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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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제도 개혁을 통한 새로운 공공미술 발전을 위하여 김준기 - 예술학,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공공미술 개혁 논의가 미술계 안팎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올 연초에 문화관광부(이하 문광부)가 새 예술정책 초안 가운데 하나로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를 공공미술제도로 전환’하는 방안을 제안하면서 보다 구체화한 이 논의는 미술계 내부의 시장구조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시각문화 가운데 큰 줄기 하나를 잡아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미 미술계와 시민사회 전반에 걸쳐 불투명한 관행으로 낙인찍힌 현행 ‘건축물미술장식법안’의 문제점이 개혁의 아젠다(agenda)로 설정되어 있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정부부처인 문광부가 제안한 공공미술 개혁안에 대해 미술계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합의안을 도출할 것인가에 있다. 올 하반기에 추진될 입법화를 앞두고 미술계 전반의 다양한 견해들이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공공미술제도의 개혁 방안을 중심으로 미술계의 저류에 흐르는 갈등과 불신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대화를 통해서 긴 안목을 가지고 우리 미수계의 장ㆍ단기 현안을 고민해 보자는 차원에서, 현재의 논의 현황에 대한 진단과 더불어 다소 이상적인 논점까지도 언급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조만간 열리는 문광부의 공청회를 통해서 첫 가닥이 잡히겠지만, 지금까지 서너 달 동안 물밑에서 설왕설래했던 공공미술 논의를 수면 위의 공론의 장에 올려놓고,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한 민주적인 토론과정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시론 차원에서 기존 틀이 간과한고 있는 몇가지 논점을 제기하고자 한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공공미술 개념을 공유하는 공론의 장 미술장식품과 공공미술에 관한 의식이 미진한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특히 미술계 전문가들조차 환경조형과 공공미술에 대한 개념정립이 되어 잇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논의진전을 더디게 하거나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불투명한 관행은 투명한 절차와 집행에 의해 개선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다. 그러나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가 계파간이나 이익 집단 간의 대립이나 갈등으로 비화되는 일은, 문화부가 제시한 개혁안에 찬성하는 쪽과 이의를 제기하는 쪽을 불문하고, 개혁의 본질을 호도하는 억측이다. 이 중차대한 논의의 향배를 가늠하는 데는 미술계의 문제를 떠나서 성숙한 시민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공공미술에 대한 범미술계의 성찰적 대화의 자세를 견지하는 상식인 자세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근간에 일기 시작한 공공미술 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시각예술진흥과 도시환경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하는 문광부의 핵심 사안은 이렇다. 첫째 미술장식 개념을 공공미술 개념으로 확대하며, 둘째 민간건축주의 공공미술품 직접 설치이외에 기금 납부제도를 도입하고, 셋째 국가 및 공공미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투명성을 높이고, 다섯째 공공미술 중개업체 등록제도를 도입한다는 것 등이다. 많은 부분 현행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개혁적 논의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공공미술 논의의 핵심이 생략된 소극적인 처방이라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한 마디로 근본적인 치유책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공공미술 논의를 전제하는 핵심 논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현 단계 우리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공공미술 개념에 대한 치밀한 구상과 그 공유과정에 관한 섬세한 배려이다. 다시 말해서 공공미술의 개념을 나눠가지는 절차과정이 있어야만 제도 개혁이 성공한다는 말이다. 건축물미술장식품법의 기본 취지는 ‘미술품으로 건축물과 도시미관을 장식한다’는 데 있다. 80년대 중ㆍ후반부터 시행된 이 법안은 그동안 한국사회에 수많은 공공미술품을 탄생하게 한 법령으로서 연간 수백억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공공장소에서 시각예술품을 생산해 내는 데 쓰이도록 하는 법률장치로 작요해왔다. 그러나 이 법령은 일부 작가들에게는 커다란 먹거리로 작용했을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미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을뿐더러, 시민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서지 못하는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게 이미 잘 알려진 안팎의 비판이다. 지금껏 십 수 년 이상 지속되어 온 한국형 공공미술 법안인 건축물미술장식품 법안이 왜 이토록 전면적인 개혁 논의의 대상이 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법령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이전에 공공미술에 대한 공공적 논의 틀이 부재했음을 지적해야 할 거이다. 공공미술의 논의틀 부재는 다름 아닌 비평적 시각의 부재를 뜻한다. 공공미술은 그 동안 비평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왔다. 그 내가 아는 한,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월간『미술』에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나온 조영남의 환경조형물 탐방기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월간『미술』,2003)와 국민일보 손수호 기자의 『길섶의 미술』(한울,1999)을 제외하면 한국의 공공미술을 다룬 변변한 비평서적 한 권 없는 것이 한국 미술비평계의 현실이다. 비평의 사각지대에 머문 공공미술은 그동안 ‘눈먼 돈 먼저 따먹기’ 식의 생계형 프로젝트로 방치되어 왔을 뿐, 예술적 가치와 공공적 효율성의 잣대로 검증과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은 채 방치 되어 왔다. 이제 우리미술계에도 그리 낯설지 않은 공공미술(公共美術 Public Art)이라는 개념이 실질적인 법제도 개혁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도 개념적 합의는 미진한 상태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너나없이 머리를 맞대고 공론의 장으로 나서야할 가장 큰 이유이다. 제도 개혁의 핵심은 민간의 합의 도출이다. ‘미술장식품법인’에 의한 환경조형물은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미술계의 골칫거리였다. 개혁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개혁추진 세력의 현실 파악 능력이나 정치력이 미진했다는 점도 일부 요인이었으나, 여러 갈래로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어낼 만한 묘안이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공공미술 제도의 난맥상을 해결하는 것은 우선 현행 법령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제도적 투명성을 확립하는 것이 관건이다. 금액에 비해 턱없이 부실한 작품의 양적ㆍ질적 수준 미달의 상황, 소수가 독점하는 공공미술 시장, 예술의 자율성이라고 하는 모더니즘 미학에 근거한 엘리트적 예술 자율주의의 일방적인 시각적 폭력 등이 문제다. 척박한 미술시장에 그나마 연간 5백억 이상의 시장규모로 추산되는 것이 이른바 조형물시장이다. 이 조형물시장을 공공미술 개념을 도입하여 법제도화 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어려운 일일수록 실타래의 끝매듭을 찾아 하나씩 해결해 나가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해결책의 첫걸음은 불투명한 관행을 직시하는 일이다. 문제제기의 첫마디로 흔히들 작품의 질을 이야기하는데, 그 작품의 질이라는 게 꼭 작가의 자질과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미적 판단의 문제로 귀결시키기에는 제도의 허술함이 너무 크다. 제도적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작품의 외형가격과 실질적인 제자가격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거품을 빼야 하는데, 이 과정의 핵심은 공적자금의 투여에 걸맞은 공공미술품을 생산해내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다. 둘째는 ‘분배의 정의’이다. ‘미술장식품법안’은 예술가의 창작을 지원한다는 취지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작가들이 공공미술 프포젝트를 수행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창작에 매진할 수 있도록 분배의 정의를 실행해야 한다. 공공미술품 생산과정의 투명성과 분배의 정의, 이 두 가지의 실행은 작품의 질을 확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다음은 개정하려는 법안의 합의 과정과 실효성 문제이다. 공공미술 논의의 모양새가 현재로서는 국가 행정부서인 문광부에서 앞장서 공공미술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정책 제안을 내놓은 상태인데, 이에 대해 조소작가 단체와 화랑협회 등 일각에서 반대의견이 나온 점은 어쨌거나 우려할만한 이리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아직 매끄럽게 특정 사안에 대해 공론화 과정을 진행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으로서는 우선 민간차원의 논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수년 전 몇몇 의원의 공공미술제도 입법 제안이 있었으나, 일각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재경부가 내놓은 ‘종소세법안’도 화랑계와 고미술계의 거센 반발로 인해 폐지되는 곡절이 있었다. 이런 전례를 놓고 볼 때, 미술인들이 몇 년 전의 공공미술 법안이나 얼마 전의 종소세 문제를 대하듯이 이번 공공미술 논의를 대하면 일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문광부가 내놓은 공공미술법안 도입 계획은 충분한 민간의 토론 절차를 거쳐야만 성공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술인과 시민사회가 함께 만나는 민간의 합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일이야말로 공공미술 개혁의 중요한 절차이다. 민간의 합의구조는 법안의 실효성을 높이는 일로 직결한다. 어떠한 규제법이라도 그 실질적 효력을 가늠하려 하면 민간의 민주적 동의절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문광부가 내놓은 공공미술법안이 개혁적인 대체입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이미 문화선진국들의 사례에 대한 다각도의 검토과정과 몇 년에 걸친 여론 수렴과 공공미술 개념에 관한 관심도 증가 등 미술장식품 법안을 대체할 공공미술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은 주지를 넘어 숙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실효성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과연 자기 집 앞마당에 조형물을 안세우고 현금으로 낸다는 취지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을지가 심히 의문이다. 공공미술 기금을 준조세 형태의 건축주의 기부금으로 마련한다는 계획은 전적으로 민간 건축주들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인데, 현장의 여론은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찮게 들리고 있다. 혹자는 이 방법은 현재의 리베이트 관행을 부추기거나 공식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하는데, 필자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는 하나, 반대여론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의문을 현명하게 풀어나기는 방법은 여론을 충분히 듣고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공미술센터를 설치하여 공공미술기금을 운용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각종 예측이 분분하다. 특히나 센터의 운영 주체 문제를 놓고 일각에서는 특정 세력운운하며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고 있다. 거대한 공룡에 비유되는 이 공공미술센터는 현행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취지와 달리 또 다른 모순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비교적 낙관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보아 그러하다. 하회 전반적으로 투명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 마당에 특정 기관을 통해서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비리와 담합이 존재한다고 예단하기에는 이르지 않은가. 오히려 센터의 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더 현실적일 것이다. 공공미술센터가 관련 정보의 집결과 배분의 역할을 감당하고, 세부의 실행은 각 지자체별로 공공미술위원회를 두어 투명한 집행을 감리하는 쪽으로 논의의 가닥이 잡히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자치와 분권의 시대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발상과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문광부의 안이 얼마만큼 이러한 대목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사실은 중앙단위의 공공미술센터보다는 지역단위의 공공미술위원회가 더 걱정이다. 각 지자체별로 위원회를 꾸려서 운영할만한 인적 역량이 얼마나 될지가 걱정이다. 실제로 각 지역의 미술장식품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과저에 있어서 지자체와 지역단위 미술가 단체가 결탁하고 짜고 치는 미술장식품 양산을 지속해오고 있는 현실이 제도 틀을 바꾼다고 해서 얼마나 바뀔지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투명한 관행을 만들어 나가는 엄정한 틀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사전에 철저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민주적 헤게모니를 전취하고 도덕적으로 선명성을 가진 주체를 세워나가는 과정이 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개혁의 시대이다. 공공미술에 관한 한 누가 뭐래도 개혁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 미술계가 너나없이 상생하는 길이다. 개혁의 주체가 되느냐 대상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각 주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스스로 개혁의 주체를 자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만큼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 되려는 주체들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만인이 상생하는 길을 두고 혹 개념적으로 오해가 있거나 작은 이익을 버리지 못해 대세에 어긋나는 동료 미술인들이 생긴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일 것이다. ![]() 새로운 공공미술 논의가 빠져있다 이상에서 거론한 조형물시장의 구조적 개혁만큼이나 중요한 공공미술 논의가 간과되고 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거대한 수직 상승의 입체 조형물을 공공미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낮은 수준의 공공미술 인식을 바꾸지 않은 한, 새로이 바꾸고자 하는 공공미술 제도도 기존의 조형물시장의 먹이사슬 구조 재편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소작가 단체에서는 성명서를 통해서 환경조형물 시장과 공공미술 제도를 분리해서 사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공공미술에 관한 인식이 미술장식품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공공미술,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시민교육 미술프로그램 등 시각문화예술의 생산과 향유를 이원화하지 않는 새로운 공공미술에 대한 전향적이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공공미술 논의를 미술계 안에서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단한 오류이다. 생산자의 시각만이 아닌 향유자의 시작으로 문제 해결책에 접근해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향유자 시민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공공미술법안은 환경조형물의 변종에 그치기 십상이다. 공공의 요청으로 제작되어 사회적 맥락과 참여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지는 공공미술은 ‘특정장소의 역사성과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정치적 효과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삶의 현장으로서의 생활세계와 직결되어 있다. 대지미술, 행동주의미술, 정치적 개념미술 등 사례를 들어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 개념은 예술을 통한 공공체 건설, 사회적인 표현, 공공적인 안건을 만드는 새로운 미술가의 역할을 지향하며 주제의 문제나 장소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활성화된 가치제계의 미학적 표현을 시도하는 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요컨대 공공미술은 다양한 관객들과 삶의 이슈를 소통하기위해 가능한 모든 매체를 사용하는 시각예술을 의미하며, 장소(Site)의 역사적ㆍ생태적ㆍ사회적 측면에 대한 관심으로 관객과의 관계설정을 모색하는 미술행위이다. 따라서 공공미술론은 특정 공간 대상의 미술해위. 현실 개입의 실천적 경향성, 장소와 동시대성을 공유하는 현장성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탈근대적 의미의 예술적 실천을 담보하는 개념이다. 특히 새로운 공공미술 논의는 상호작용, 관개, 효과 등에 관한 논점을 제시함으로써 미술개념의 확장적 양상을 대변하는 논의틀이기도 하다. 공공미술 제도 개혁과 맞물려 새로운 공공미술 개념을 근거로 한 다음의 논의는 ‘장르간 협업 개념. 프로그램으로서의 공공미술, 지역 공동체에 복무하는 프로젝트’ 등을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개념의 공공미술을 위하 몇 가지 전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장르간 협업 개념’이다. 지금의 공공미술 논의는 미술장식품 법안을 어떻게 하면 투명성 있는 제도로 전환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기존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에만 집중해 왔으므로, 말이 공공미술이지 실상은 소극적인 의미의 환경조형물법안 개선 논의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건축과 조경, 가로 및 도시 계획 등 공공 영역의 시각 문화환경 전반의 영역에 걸친 다장르간 협업개념이 절실하다. 시각예술이 다 지어진 건물 앞에 얼마나 어울리는 장식품으로 자리 잡아 공간의 미학을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 정도로는 안 된다. 문패조각 대신에 기금을 걷어서 인근 조각공원을 세우겠다는 생각 또한 초보적인 수준이다. 시민의 삶의 터전인 도시 전체를 놓고 시각예술이 감당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수고 역사적 장소를 복원하는 문제에 미술가들의 상상력이 함께 했어야 했다. 청계천 복원한다고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명목상으로는 ‘생태 환경 복원’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실질적으로는 도시 개발이라는 저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어떻게 하면 삶의 질을 전환하는 문화적 프로젝트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다. 얼마 전 의왕시에서 열린 고가도로 기둥을 환경미화 대상으로 삼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보라. 적은 예산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덩어리 흉물을 대체하기란 중과부적이 아니었던가. 미술가들의 활동 영역을 전시장(예술세계)에 가두어 두고 도시공간(생활세계)의 온갖 시각적 폭력들을 뒤치다꺼리 하게 하는 지금의 마인드로는 공공적 시각문화의 생산과 향유란 요원한 일이다. 예술적 창의력을 삶의 공간으로 끌어내는 틀이야말로 지금의 공공미술 논의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논의이다. 둘째, ‘프로그램으로서의 공공미술’에 관한 논의이다. 제도화된 미술문화 공간은 주로 전시장으로 국한되어 있다. 전시장의 화이트큐브에 갇힌 시각예술만으로는 삶의 역동성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일상 생활공간에서 미술을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미술관으로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 일 만큼 중요한 것이 지역주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미술이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다. 액자에 낀 그림을 싣고 동사무소로 가는 일만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역주민과 직접 만나 생산과 향유를 함께하는 미술교육 프로그램, 나아가 교육미술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미술 문화 공간 이 부족하다는 얘기들은 하는데, 각 구청 단위로 만들어져 있는 문화체육회관을 공공미술의 장소로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미술가들을 미술교육 프로그래머로 활용해서 동사무소에서, 동네 공운과 놀이터에서, 학교와 병원에서 미술이 삶의 영역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공공미술의 개념으로 끌어안아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미술전문가들을 활용하는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학교 및 사설 교육기관에 시각예술 전문가를 배치하여 교육자로 삼는 것은 어떤가. 여기서 말하는 교육자란 학생만은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미술교사를 말하는 것이다. 제도권으 전시장 미술은 게임방에 불과하지만 제도화하지 않은 삶의 현장의 미술은 역동적인 현실 그 자체이다. 전시장이라는 하드웨어를 활용하는 것과 삶의 영역에서 미술프로그램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일은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미술의 공공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셋째, ‘지역 공동체에 복무하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지자체의 공익사업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만드는 일이다. 이 문제는 공공미술의 생산 방법과 더불어 내용적 완결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개념이다. 기실 우리 사회의 시각예술 생산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절대미학을 추구하는 데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삶의 영역으로 파고드는 공공미술은 지역성을 안배한 컨텐츠로 거듭나야 한다. 미학적 보편주의와 글로벌리즘은 문화적 패권주의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예를 들어서 광주에서 태어나서 그곳의 미술대학을 졸업한 미술가가<광주비엔날레>의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광주의 역사와 생태와 풍수를 꿰뚫어서 광주항쟁의 현재성을 이야기하고, 광주의 도시화를 되짚어보고, 광주천의 생태를 배워나가며, 광주 인근 화순과 담양 사람들의 낙후한 삶을 어루만지는 치유와 예언의 예술을 펼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없이 훌륭한 공공적인 미술가로서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예술가들의 실천을 돕는 일이야말로 공공미술 제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지자체의 문화인프라와 문화예술 인력을 풀가동하는 전천후 공공미술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의 협력 시스템을 만들어서 시각예술의 쓰임새를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oo시/구 공공미술 프로젝트 팀’ 같은 걸 상상해보라. 미술가들이 특정 프로젝트별로 지역 공동체의 시각문화예술의 생산에 복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것은 예술 생산의 공공성과 더불어 예술가들의 사회적 존재 근거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커뮤니티의 이익에 복무하는 예술 생산 시스템은 이미 20세기 전반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험을 거치면서 수많은 공공미술을 생산해 온 방법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예술 시스템이 예술가들을 편향된 예술적 취미에 가두어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술가들의 창의력을 압살해버린 불행한 역사를 들어왔다. 러시아의 미래주의와 구성주의가 얼마나 철저하게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의해 숙청되었으며,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한국전쟁 이후 북으로 올라간 수많은 천재적 예술가들을 소외시켜 왔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역사는 후세에 반복하지 말아야 할 오류의 교훈을 남기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의 복무하는 미술창작단 논의는 철저하게 예술적 창의력과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짜여져야한다. 예를 들어서 ‘서울시 종로구의 공공미술 프로젝트팀’ 이 설립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종로구청과 지역주민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서 종묘에 비해 그 역사적 가치가 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는 그 곳을 문화예술적으로 복원하는 일, 다수의 미술관과 인사동과 사간동 같은 문화인프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문화적이지 않은 거리의 시각환경을 개선하는 일, 빈곤한 프로그램으로 일관하고 있는 인사동문호특구의 문화행사를 살아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일 등 해야 할/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은, 우리의 현장미술의 역사를 공공미술 개념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재해석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공공미술의 개념이 없었던 십 수 년 전에도 이러한 시도는 도처에 존재했었다. 현실의 틀을 비판하며 출판과 매체미술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판화교실을 열고, 생활미학을 바탕으로 함께 그림을 그리는 공동창작과 걸개그림을 고안해 낸 새로운 미술운동의 창의적인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에게 공공미술의 개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닐 것이다. 시대적으로 독재정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민중미술이라는 특수한 개념으로 진행되었을 뿐, 이러한 시도들이야말로 미술이 시민사회에 대해 역동적인 시각적 소통을 제안했던 보편타당한 공공미술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에 보석같이 박혀있는 현장미술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안의 공공성을 되살려 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청하는 전향적인 의미의 새로운 공공미술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지 않겠는가. 출처: 김준기 2004 문화예술 통권299호 (2004. 6) pp.37-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