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공공미술은 문화적 기득권이 아니다
성완경
2004-08-03
공공미술은 문화적 기득권이 아니다
-[총론]공공미술 개념과 공공미술 정책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성완경 인하대 교수


이해와 자본으로 얽힌 공공미술 시장
1984년 서울특별시로부터 시작하고 1988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던 ‘건축물 미술장식제도’ 운영의 실태가 악화되어 그 문제점에 대한 논란이 커진 것은 1995년경부터다. 이미 1993년 즈음부터 환경조형물의 문제와 그 개선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신문, 잡지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와 더블어 ‘공공’개념이나 ‘공공미술’ 얘기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건축물 미술장식의 문제점이 심화되고 그 개선점에 대한 논란이 컸던 이 시기가 화랑기의 불황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고 그것은 IMF직전 시기와 겹친다. 서울의 유명 화랑들이 대기업 신축빌딩의 건축물 미술장식 패키지 납품이라는 신종 영업분야에 거의 일제히 진출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고가의 대형 작품을 중개하며 화랑 판매 작품에 준하는 비율의 상당한 지분 액수를 챙길 수 있는 이 신종 시장의 의미를 화랑들이 놓칠 수 없었으리라. 그 프로모션을 위한 행보는 막강하고 치열했다. 국제화랑이 하얏트 호텔에서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세계환경조각전>(1995)을 열었는가 하면, 가나화랑도 역시 신라호텔에서 기업체 건축물 미술장식 판촉을 위한 큰 전시를 열었다.
현대화랑의 지원 아래 기업미술 전담 회사로 설립된 KOPAC(1996)은 한국미협과 손잡고 국내외 주요 환경조형물 공무에 뽑힌 작가들의 작품 모형과 그래픽 등을 모아 <예술과 도시전>(1997)을 열었다. 그리고는 기왕의 뛰어난 마케팅 노하우 플러스알파를 무기로 하여 대형건물의 장식 쪽으로 시장을 확장해나갔다. 공공미술 시장은 IMF가 지난 후 지금까지도 장기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화랑업계를 불황 속에서도 그나마 버티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원천이 되고 있다.
화랑들이 이렇게 사적 예술로서의 갤러리 아트를 공공미술 영역으로 수평 이동시키는 데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마케팅 능력 말고도 기본적으로 클라이언트와 화랑과 작가가 동일한 이해를 나눠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건축주는 이왕이면 유명작가 브랜드를 선호한다. 아니면 어떤 ‘작품’이라도 좋으니 건물 준공 허가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랑은 이 매력적인 시장 속에서 자신이 세일즈하려는 대상이 갤러리에서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 ‘미술’이어야 할 필요가 절대적이다. 이 이해관계는 거기에 대하여 ‘작가주의’로 화답하는 화가나 조각가의 경우도 똑같이 나누고 있다. 공공미술이 작가적 개성과 스타일에 기반한 사적 미술과 다른 특성의 문제는 여기서 별로 따져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적 특성, 곧 예술가로서의 경력과 지명도, 스타일적 일관성, 공예적 완결성 같은 특성이 클수록 세일즈에 유리했다. 따라서 세일즈를 하는 대상이 환경조형물이든, 미술장식이든 혹은 공공미술이든 그 구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앞서 얘기한 KOPAC의 <예술과 도시전> 카달로그에 인사말로 실린 현대 갤러리 대표의 글이 그 좋은 예이다. “ㆍㆍㆍ아름다운 도시환경을 만들 수 있는 ‘대중 속의 현대미술’이 되는 진정한 퍼블릭 아트(Public Art)를 구현해보고자 바람직한 환경조형물의 모델을 제시한다는 취지에서 본 <예술과 도시전>은 기획되었습니다.” 여기서 퍼블릭 아트라는 용어의 사용은 최근 공공미술로의 제도 전환을 강력히 반대하는 일부 예술가들이 건축물 미술장식과 공공미술은 별개라고 주장하며 후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아마도 미학적이고 순수 조형적인 측면에서 공공미술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명분에 미치지 못하는 건축과 미술의 협업
20세기, 특히 그 후반기에 들어서서 현대조각은 건축과 상호 연계되어 삭막한 현대 도시공간의 재활성화에 크게 기여하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왔다. 현대적 건축미학의 경제적 효율설이 높은 박스형 건물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작은 광장이나 녹지대를 조성하고, 그 위에 동일한 현대주의 미학의 거대한 추상조각을 끼워 놓은 일은 도시 재개발업자가 개발해낸 새로운 환경미술의 전형으로 점차 자리를 굳히게 된다.
미국의 SOM(Skiomore, Owing & Merrill 건축사무소)에 소속된 건축가 고든 번샤프트(Gordon Bunshaft)와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가 1950년와 1960년대에 만들어낸 건축가와 조각가 간의 반복적인 협업 사례는 현대 도시에서 경제적 이해와 미학적 이해의 새로운 유형의 결합이 어떻게 하나의 매력적인 도시 공간 세일즈 패키지로서 클라이언트에게 파고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우리가 보통 환경미술에 관한 사례로 가장 많이 보아 왔고, 머릿속에 전형화 시킨 것들이 바로 이런 유형의 환경예술품들이다(노구치, 칼더, 무어, 피카소, 뒤뷔페 등), 도시공간 속에서 미술과 건축의 파트너십의 일반화는 현대조각의 발전에 비상한 중요성을 갖는다. 건축가와 미술가의 창조적 협업은 공공미술의 아슈 속에서 이상적 명분을 주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협업의 실제적 양상은 명분에 크게 미치지 못하며 극히 제한적임이 점차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이런 협업의 산물들은 대개 건축물의 설계 단계에서의 협업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건축물과는 별개로 나중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조형물들, 이른바 ‘플로프 아트(Plop Art)’ 유형의 작품들이다. Plop는 ‘텀벙’하고 물속에 물건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건축적으로 미리 다 짜인 공간에 작품을 ‘쿵’ 떨어뜨려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이런 작품들은 건축가와 머리를 싸매고 뭘 찾아내는 식의 골치 아픈 협업이 필요하지 않다. 건축가라는 직업의 자기 완결성과 자족성도 예술가와의 협업에 장애로 작용하기로 한다. 건축물은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기 때문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을 건축가가 원하지 않는 것이다.
고도화된 엔지니어링의 요구나 건물의 대형화 추세, 점점 더 증대하는 산업 프로덕트로서의 건축의 성격도 또한 건축과 예술과의 협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예술의 모호함이나 창조성이 개입할 틈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기술적 측면 말고도 문화적인 측면이 오히려 통합을 어렵게 하는 더 큰 이유로 중시돼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오늘의 사회가 미술과 건축을 통해 상징화시키고 싶어 하는 가치들의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미술, 문화적 동력으로 움직여야 한다.
문제의 이 같은 문화적 차원은 오늘날 환경미술이나 공공미술이 안고 있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이 단순히 공간미학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한 시대와 한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화, 사회, 정치적 차원의 전반적 국면 변화와 맞물려 있는 문제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문제 제기의 시각으로 우리가 지금의 사회와 문화를 투시한다면 이제 공공공간은 무어나 칼더 류의 조형물들이-물론 가족상이나 모자상들은 더구나 아니고-편안히 앉아 있어야 할 시대는 한참 지났다. 공공영역은 이제 그 개념이 복합적일 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도 기능적으로 덜 안정되어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
공적공간과 사적공간, 사유재산제와 도시공간의 정치 경제학 등 공공미술의 진짜 문제의 핵심은 공공의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탐색으로부터 찾아져야 할지 모른다. 공공미술은 뉴욕의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아를렌 라벤(Arelene Raven)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더 이상 마상의(馬上, 말을 탄)영웅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이미 1960년대 말의 주민벽화 운동 등 지역사회 문화운동이나 좌파적 초기 개념미술에서 비롯한 컬추럴 액티비즘이 등장했던 이유나, 이것을 계승하며 1980년대에 다시 거리의 미술, 게릴라 연극, 비디오 아트, 페이지 아트(인쇄매체를 통한 액티비스트 아트), 빌보드 미술, 포스터 액션과 시위, 구연 이야기(오럴 히스토리), 춤, 인바이런먼츠, 포스터, 벽화,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영역과 방식으로 공공영역에 삼투해 틀어갔던 새로운 대안문화 행위들이 성행하게 된 배경이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1960년대가 사회적 항의와 커뮤니티 문화운동의 시대였고, 1070년대에 미술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개념미술의 조류 속에서 미술의 언어를 해체하고 예술개념을 확장시켰던 세대였다면, 1080년대는 바로 이 세대가 이같이 확장된 예술개념을 커뮤니티 개념에 접목시켜 공공미술의 지평을 확장해 나간 것으로 최근의 미국 공공미술의 변화를 크게 짚어 볼 수 있다(1960년대가 이때부터 시작된 NEA의 지원 속에서 앞서 말한 모뉴멜탈한 규모의 추상조각을 성행시켰던 시기였는데, 동시대 공간 속에서 이와 같이 ‘다른’ 미술개념이 배태되어 오늘 그 결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 공공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끝없이 새로운 장르를 창안하는 것과 비전문가 집단과의 협업적 모색이다. 이처럼 1980년대 이래로 미국의 공공미술은 분명한 특징과 조건을 가진 하나의 장르나 카테고리로 기능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비평가들은 미술이 미술관이나 화랑등 문화 중개기구를 끼고 있는 프라이비트 아트(시적 예술)와 이런 문화 중개기구의 회로를 비켜 가면서 이 세계와의 새로운 맥락을 구축하려는 퍼블릭 아트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의 예술행위에서는 관례적 의미에서의 공적, 사적 영역, 이 두 가지가 아주 명쾌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닐 수 있으며 그러한 사례는 오늘날 점차 많아지고 있다. 이제 이분법을 넘어서 미술과 관중과 그 생산방식 및 개입방식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지형학이 요구되고 있다.
오늘날 이런 각도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나 큐레이터, 비평가들의 사고에서 공통되는 기반은 아방가르드 아트가 아직도 가능하며, 그것은 예술가의 스튜디오 속에서의 자기 방어적인 유폐가 아니라,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생동하는 거리에서의 동력학 속에 위치한다는 발상법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공공미술과 그 청중과 그 의미에 대한 참신한 접근방법은 이런 사람들의 사고체계와 전략에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오디언스, 즉 관객이 단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는 점이다.
일찍이 평론가 루시 리파드(lucy Lippard)가 요약했던 것처럼, 오늘의 공공미술을 둘러싼 가장 위대하고도 정의하기 어려운 질문은 “어떤 관중(public)인가, 예술과 수용 관중 사이에 상호 교환이 있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공공미술 관련 쟁점과 의견들
그 동안의 논의 가운데 중요한 쟁점들과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말하겠다.

첫째, ‘미술장식이냐 공곰미술이냐’의 문제가 있다. 건축물 미술장식과 공공미술 미술은 서로 상충하는 개념인가 아니면 공존하는 개념인가
서로 공존 가능한 개념이다. 공공미술 속에 기존의 건축물미술장식이 포괄되고 도 건축물 미술장식 속에 공공미술개념이 적극 결합할 가능성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공미술연구가 박삼철이 최근에 한 글에서(출처미확인)이야기한 ‘새 장식(the new Decorative)’과 ‘개입(the Participatory)'이 이에 대한 개념정리에 유요할 수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장식은 건축물을 만들 때 미술을 도입해 미술적 장식효과를 높였던 유럽 건축물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의자, 휴지통, 가로등 등 이른바 스트리트 퍼니처가 대표적이며 도시시각 환경에 미술을 디자인적 개념으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때 이전의 장식미술과 ‘새로운 장식’이 구분되는 점은 단순 장식이 아니라 다기능적 장식을 미술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이다. 창작의 목표를 사용자 중심에 두고 미술의 쓰임새를 사람과 공간의 정서를 어루만지면서도 기능(의자, 방향지시, 시계 등)을 수행하는 데까지 확장한다는 것이다. 개입은 미술작품을 단순히 미적 오브제로서의 제한된 기능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미술적 비전제시의 적극적인 표현매체로 사용하는 경우다. 에이즈 문제로 촉발된 AIDS미술을 비롯해 최근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은 모두 개입을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개입은 미술을 사회에 개입시킨다는 의미 말고도 작품의 제작과정을 작품의 완결된 결과 못지않게 중요시하고, 그 과정에서 관람객들의 참여를 매우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생활 공간과 일상적인 이슈에 대한 창의적 개입과 관람객의 소통적 참여를 공공미술의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미술이 사회를 어떻게 만나고, 사회에 대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 하는 고민의 결과라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공미술은 건축의 액션 플래닝, 환자 중심 의료(People-Centered Medicine)와 같은 개념의 미술행위이다. 미술이, 건축이, 의학이 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고민에 따라 전통적인 건축, 미술, 의학 개념을 떨쳐내고 새로운 모습을 찾은 것이다. 사회적인 단어로 얘기하자면 참여 민주주의가 미술, 건축, 의학적으로 적용된 것이 공공미술, 액션 플래닝, 환자 중심 의료라는 것이다.

둘째, 관리에 관련된 것인데 기금 풀제는 사적 재산권 영역의 침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인식의 문제라고 본다.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공유된다면 그것을 사적 재산권 영역의 침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센터의 필요성을 지지한다.
마찬가지로 기금 풀제 역시 지지한다. 이 두 가지는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역할에 관한 쟁점들인데 그것을 1.중개상 2.정부와 지자체 3.공공미술 전문관리자 4.공공미술센터로 나누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중개상 양성화에 반대한다. 그것은 실질적 해결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점진적으로 그것은 3항의 공공미술 전문관리자로 대체되거나 그 수준의 전문성을 갖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거의 사후 심의적인 수준의 현재와 같은 심의보다 중요한 것이 애초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과정이다. 과정의 초기에 정말 좋은 작가와 작품이 선정되도록 하는 제도 운영이 시행되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잘 되면 현재와 같은 요식적 심의는 자동적으로 폐기되거나 혹은 크게 개선될 것이다. 초기에 작가가 잘 선정되도록 하는 보다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과장이 고안되어야 한다. 중개 내지 기획 과정이 지금보다 휠씬 비중이 높아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공공미술 관리자(Public art administrator/영국)'나 ‘공공미술 큐레이터’ 혹은 ‘공공미술 코디네이터(미국)’ 같은 참고할만한 좋은 제도 운영의 사례가 외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프랑스에서 1991년부터 프랑스재단이 시도해 온 ‘새로운 중개인(Le nouveau commissaire)’ 및 ‘새로운 주문자(Le nouveau commanditarie)’ 개념에 기초한 공공미술의 보다 적극적인 중개 형식 내지 기획 형식이다. 단지 중개자만이 아니라 주문자도 또한 새로운 착안과 필료를 갖고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수요를 ‘정의’ 할 수 있어야 된다. 그리고 물론 양자 사이에 더 고급한 대화와 협업이 있어야 한다. 그 점만으로도 이미 주문자의 무관심과 무지에 기인한 현재의 천편일률적인 미술장식품 제도보다 더 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공미술센터는 꼭 필요한 기구다. 이것이야말로 개정안의 핵심이고 공공성의 제고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그 기능과 업무, 권한, 조직, 재원 등에 대해서 아주 꼼꼼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공공미술센터’의 기능이 심의, 감리 같은 규제성 기능보다는 공공미술에 관한 자료 집중과 연구, 자문, 교육, 홍보 등의 지원적 성격의 일로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원 조달 방안도 0.5%옵션에 의존하는 방안보다 국가예산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는 일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구제적 성격의 제도 운영으로 관행을 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미술인들 자신의 시각 변화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여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새 장르 공공미술’ 개념을 지금 당장 한국에 제도상으로 배려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완벽한 제도는 없다. 규제보다는 문화적 동의를 얻어내는 길이 더 확실한 길일 수 있다. 좋은 사례가 생기면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하게 되어 있다. 따라가고 싶은 좋은 모델을 만들어내는 거이 중요하다. 그렇게 영향력은 간접적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건축물 미술장식제도의 가장 큰 맹점 중 하나는 공공미술의 기본 개념과 진행 과정이 너무 요식화 된 수준에서 축소된 채 진행됨으로써 높은 질적 수준을 담보해내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행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모델, 좋은 실행 사례의 존재다.

넷째, 사적 시장이냐 공공적 관리냐의 문제다
여기서 핵심은 공공미술을 지금처럼 민간부문 자금으로 건축주의 사적영역에 계속 놓아두는 것만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공적 관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 점이 더 명료하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관광부의 개정안은 이 점에 있어서 다소 절충적이다. 더 명료해야 한다.

다섯째, 현대미술의 복합성과 다원성, 진보성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이 있다. 사실 이것이 공공미술문자의 해법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공공미술을 그 자체만 떼어내어 얘기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과 사회의 폭 넓은 외연 속에서 예술의 경로를 제대로 보는 일이다. 공공미술과 예술진흥 정책이 통합적인 시각에서 새로 연구되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을 갖는다. 말하자면 새로운 문화예술발전정책의 구상이라는 더 큰 틀의 종합적인 방안 속에서 새로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하리라는 것이다.

출처: 성완경 2004 문화예술 통권301호 (2004. 8) pp.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