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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진실' 속에 담긴 소통의 계기 : 공공미술에서 제기되는 문제의식들
박찬경
2008-03-02

‘ 내면의 진실’ 속에 담긴 소통의 계기


박찬경(서양화가,평론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건물 앞에 ‘모더니즘’ 조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것은 물론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1%법) 이외에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덕분이다. 간단히 말해서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 한국의 공공미술은 서구로 보자면 자국의 민족영웅을 기리는 19세기적 인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공공 영역을 국가권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화예술에 미친 강력한 국가권력의 힘과 잔재 때문에, 우리의 일반적 기억 속에서 ‘공공성’이라는 말은 여전히 규율, 불친절, 완고함, 보수성 등을 떠올리게 한다. 개인이 떳떳하게 의사를 밝히고 능력을 발휘하도록 권장하는 의미로서의 공공 영역이 아니라, 개인에게 권위의 불멸성을 각인하는 장이라는 의미로서의 ‘공공’ 관념을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권위적 이미지는 자유주의, 개인주의로 상당 부분 대체된 것이 사실이지만, 공공이란 말에는 여전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중년 남성적인 뉘앙스가 달라붙어 있다.
미술가와 관객에게도 억압적, 일방적인 공공성의 흔적이 내면화되어 남아 있다. 이는 ‘공공미술’을 ‘사적 영역의 미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볼 때 뚜렷해진다. 사적 영역의 미술에서 보이는 공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부재, 특히 사회적 상상력의 일천함은 우리 미술의 매우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문제 설정이 일종의 장르 개념으로서의 ‘공공미술’에서, 조금 추상적인 개념인 ‘미술의 공공성’ 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사적인 미술과 공공미술은 모순되는 것인가
언뜻 보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서로 모순되므로 타협할 수 없는 경계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구분도 우리 현대사가 만들어준 관습적인 오해인 경우가 많다. 사적 영역이 발달하면 당연히 공적 영역이 축소될 것 같지만,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은 결국 사적 영역 자체의물신화와 빈곤함으로 되먹임된다. 화랑이나 미술관과 같이 작가주의에 기초한 제도가 발달했으면서도 공공미술의 수준이 높은 지역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뒤집힌 상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미술의 공공성은 미술의 개인성과 모순되는 개념이기보다, 상호보완적인 것에 가깝다. 예술이 개인의 독특한 창조성에 기초하되, 보편적인 설득력과 공적인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일 것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하자면, 미술에서 ‘개인적인 미술’과 ‘공적인 미술’을 구분하는 것이 과연 어떤 차원에서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다. 그런 구분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구분의 차원이 정교하지 않다는 뜻이다. 본질적인 국면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무의미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분 자체가 내용 없는 형식이 되어 자주 오해된다. 이를 테면,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권위적 기념비들이 자생적인 변화 과정이나 중간 단계 없이 갑자기 형식주의적 조각들로 뒤바뀌게 된다. 형식주의 조각조차, 소위 ‘순수미술’의 에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로 불리는 정부의 날림 법안에 의지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예술언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국가는 모더니즘 예술의 정치적 무해성에 관심이 있었거나, 실은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정치, 사회, 미술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적 영역’ 과 ‘공적 영역’의 미술 사이에는 중간 형식들이 매우 빈약하다. 이것은 마치, 절차적 법적 민주주의가 날로 발달하고 복잡해지면서도, 민주주의의 ‘생활 세계적 토대’는 여전히 허약한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조응하는 것이다.

내면적 진실과 사회적 발언은 대립항인가
미술 동인 그룹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취지문> (1979)을 보면, 기존의 미술은 “고립된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다는 구절이 있다. 그토록 많은 자칭 모더니스트들이 내면적 진실을 드러낸다고 주장해왔는데도, 여기서는 고립된 내면적 진실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이 특히 재미있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개인의 내면적 진실과 공공미술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다고 본다면, 보통은 “내면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중미술에서는 전반적으로 작가의 내면적 진실‘보다’ 사회적 발언이 ‘더’ 중요하다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지금의 ‘새로운 공공미술’을 실천하는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작가의 내면적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내면적 진실조차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인 포용력이나 위트 이상의 철학 차이가 있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취지문>에서 이 대목을 다시 보면 이렇다.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는 밖으로부터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은 끊임없이 주장되는데, 왜 그 내면적 진실이란 게 잘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답은, 선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에 무관심했기 때문일 테고 나도 물론 동의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기’는 무엇이고 ‘이웃의 현실’이란 대체 무엇일까. 현대미술에서, 개인과 사회에 관한 더 풍부한 사고나 더 깊은 변증법은 없을까? 취지문의 취지는, 개인과 사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더 풍부하고 깊은 시도가 존재했다면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면의 진실은 ‘이웃의 현실’의 반대항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세포나 토대가 아닐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내면적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것이 어떤 실체가 있는 것, 객관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에피소드처럼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내면의 진실이란 어떻게든 정확히 말해지거나 사물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면의 진실을 표현한 미술은 모두 내면의 진실에 대한 일종의 ‘비유’이지, 내면의 진실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내 내면의 진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은 동시에 ‘내 내면과는 다른 것이다’라는 내면 표현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구분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내면의 진실이 없는 것도 아니고,그것이 관객에 의해 인정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것이 내면의 진실이냐 아니냐는 관객의 동의에 의해서만 상호주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객의 동의는 ‘그래, 그것이 당신의 내면의 진실인 것 같아’라는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작가의 작업을 발견하게 될 때, 이를 테면 ‘그래, 그것은 나에게도 진실이야’라는 동의가 생길 때이다. 즉, 참여 속에서 나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문제를 이렇게 본다면, ‘내면적 진실’ 속에는 이미 ‘소통’의 계기가 들어 있는 것이고, 개인의 가치를 넘어 공공의 가치로 상승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담겨 있다고 보아야 옳다. 거꾸로 얘기해서, 내면적 진실의 주장이 과다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진실을 보기는 어려운 이유는, 타인과 세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믿어왔을까? 나는 역사에 대한 부담감과 공권력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미술이 ‘새로운 공공미술’로 발전하기 위한 시도들, 즉 개인과 사회,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연결이 다양하게 시도, 모색되지 못한 것이다. 외면화된 내면과, 개인화된 공공미술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지 못한 것이다.

공공미술은 생활개선 이벤트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에서 공공미술이 겪고 있는 독특한 문제들을 발견한다. 두 인용문은 2006년 문화관광부 산하 ‘공공미술추진위원회’의 <아트인시티> 자체 평가보고서에 실려 있다.
“공공미술을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고 그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살아왔지만, 혼자 하는 일과 여럿이 함께 하는 일에는 생각과는 다른 것들이 많더라구요. 지역주민과 복지관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것도 미술이라기 보단 ‘러브하우스’ 같은이미지인가 봐요. 이것 저것 작은 부분까지 ‘고쳐주세요’, ‘이것도 해 주세요’ 하는 요구가 많고….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제 손으로 챙겨서 마무리해야 하는 일들도 있구요. 작가가 기획자 노릇을 한다는 것도 좀 그렇고.”1
“<아트인시티 2006> 사업은 이념적으로는 아방가르드이고, 정서적으로는 80년대 민중미술이며, 내용적으로는 ‘새 장르 공공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나는 실제로 둘 다 썩 틀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공공미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예술과 삶의 통합’이라는 아방가르드의 명제에 충실하려고 한다. 새로운 공공미술에는 민중운동의 ‘하방’ 윤리가 스며들어 있으며, ‘새 장르공공미술’의 어법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이 현장에서 실제로 하는 일들 중에는, 환경을 꾸미거나 생활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러브하우스’ 와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이것은 작가의 공공적 관심과 시민의 미적 취미가 충돌하거나 단순히 타협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지역민은 아름다운 풍경화를 원하는데, 작가는 지역생태 파괴에 대해 미술을 통해 발언하고 싶은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현장에서도 부딪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진술이 작가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한편 대중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공공성’이라고 부를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해당 주민공동체가 실제로는 공적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해관계를 둘러싼 주민 사이의 분란도 있을 수 있고,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지역공동체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실제로 2006년 <아트인시티> 프로젝트들 중에는, 땅을 둘러싼 주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주민들이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렇게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하면 나중에 더 큰 사업이 왔을 때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며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수용을 반대하는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막상 현장에 들어서면 공공성의 내용 자체가 혼미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아방가르드와 러브하우스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민중미술과 집단이기주의는 화해할 수 있을까? 새 장르 공공미술과 이발소 그림의 간격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개인과 사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미술과 공공성,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과 이웃의 현실 등의 원칙적인 주제들로 소환될 수 있는 가지들이다. 앞서 인용한 작가가 한탄하고 있듯이, 실제로젊은 작가 개개인이 이러한 힘겨운 미술운동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 같이 작은나라에서는 생각해둬야 한다. 과거에 민중미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들이 젊을 때는 이런 활동을 하다가 지쳐서, 결국 다른 사업을 하거나 전시장을 위한 그림 그리기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서도 내면의 진실과 공적활동은 많은 경우 왜 불일치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미술과 새로운 공공미술은 어떤 관계인가
앞서 인용한 조선령의 범주화는, 범주들을 잘 포개놓고 비교하면 유용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민중미술에서는 공공성을 ‘민중적 가치’ 속에서 정의하는 것이라고 보면, 이미 가치평가가 이루어진 공공성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새로운 공공미술에서는 참여 이전에 가치평가를 하기보다는 가치판단의 조건이나 대화의 공간을 형성하고자 한다. 민중미술이 판화를 찍거나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미술 행위 속에 대중을 참여시킴으로서 어떤 의미로든 ‘각성’시키고자 했다면, 새로운 공공미술에서는 각성이라는 계몽적이고 단기적인 목표에 열중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계몽적 계기들이 오히려 유보되는 경향이 있는 대신, 어떤 담론이나 행위가 가능하도록 새로운 조건을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가치에 따라 목표를 성공시키려는 실천으로부터, 아직 합의되지 않은 가치판단 위에서 타당성의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실천으로의 변화라는 점에서 중요하고, 또 시대에 맞는 전환이다.
여기서 필요한 인식론은, 공동체란 외부에서 예속시키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청원하는 공존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공동체는 숙고된 의지의 대상이 되기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며, 사회적인 것은 3인칭의 대상이 아니라 1인칭, 2인칭을 통해 이르게 되는 무엇이어야 한다. 이것은 민중미술에서 공동체를 ‘민중’이나 ‘계급’으로 정의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지각현상학에서 원용한 이러한 ‘사회’에 대한 인식론은 새로운 공공미술의 그것이기도 한데, 우리는 이 역시 일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조선령이 같은 글에서 지적했듯이, 아방가르드가 예술과 삶의 통합이 아니라 그 사이의 독특한 긴장을 유발하려 했다는 주장도 똑같이 타당한 것처럼, 민중미술의 ‘계몽’적인 경향이 단순히 홍위병을 양산하기 위한 것으로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단순화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다. 앞서말한 현상학적 사회 인식과는 반대로, 1인칭으로서의 공동체 성원이, 3인칭으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민중미술이 지녔던 관심 자체를 모두 버린다면, 새로운 공공미술은 관객(참여자)의 만족도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모든 미학적 평가를 후퇴시키게 된다. 이 또한 매우 우둔한 일이다. 공공미술에서 작가주의가 문제인 것처럼, 관객이 좋아한다고 좋은 작업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공미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생활개선이나 일회적인 이벤트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보통 미술가들은 공공성을 너무 평화롭고 소박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미술 장식의 개념에서 작가들 스스로가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아방가르드나 민중미술의 권위에 기대거나 그 흔적을 모방하되, 그에 대한 충분한 성찰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성은 현장에 맞는 더욱 실용적인 관심을 작가에게 요구하겠지만, 추상적인 차원에서도 공공성은 좀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는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추수하는 데 만족하고 이를 실패한 공공미술의 자기합리화 기제로 사용하게 된다. 반대로 공론장의 형성은, 물론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오히려 적극적인 분열과 논쟁의 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우리의 경우 ‘새로운 공공미술’은, 민중미술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후배 세대들이 정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개념미술적인 방법을 수용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대체로’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은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위계적인 구별을 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수혈을 받은 것이겠지만, 아방가르드의 이념적 지향이 예술의 장식적, 실용적 지향과는 구별된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나는, 거주민이나 수용자의 실용적인 필요에 완전히 흡수되는 공공미술이,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정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시민들에게 우산을 나눠주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우산의 보급이 특별히 정열적이거나 심오한 파열의 계기를 주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의미이든 공간이든 사회적 관계이든 이를 재구성하는 흥미롭고도 뜻밖의 계기를 만드는 행위일 수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1 김종길, <참 손들이 빨러, 고새 이걸 고쳤네>에서 재인용, <아트인시티2006 자체평가보고서>, 공공미술추진위원회, 2007
2 조선령, <공공미술의 조건과 현실: 물만골 프로젝트의 경우>, <아트인시티2006자체평가보고서>, 공공미술추진위원회, 2007

출처: 『2008 문화예술』328호 (2008년 봄), pp.8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