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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미술장식 제도의 결여와 파산 (현 미술장식 제도의 현실적인 문제점들)
김준기
2007-03-29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의 결여와 파산 (현 미술장식 제도의 현실적인 문제점들)

김준기(미술평론가)

사회는 다양한 가치와 욕망이 공존하는 구조체이다. 그 구조는 개인의 사유와 실천을 견인하는 객관적 실체이다. 인간은 그 구조가 쳐놓은 그물망 속에 갇힌 행위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구조와 개별인간의 관계는 부동의 전제가 아니다. 때로는 행위자의 창의와 성찰로 구조의 결함과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부단한 역동이 견고한 구조-행위자 간의 일방향성을 깨트리기도 한다.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는 미술인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구조이다. 우리사회는 지난 수십년동안 이 제도의 틀 안에서 꿈틀거렸다. 때로는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한다고, 혹자는 구조악을 재생산하는 틀을 걷어내야 한다고, 가끔씩은 헌집을 고쳐 쓰자고 갑론을박하며 여기까지 왔다.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는 이미 미학적 결여를 지적 받았고, 제도적 파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결여이고, 집행하지 못한 파산이다. 그동안 수많은 자리에서 장식으로서의 미술을 공공적 소통의 미술로 전환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결여와 파산을 논의 했건만 다시금 이 자리에서 철지난 유령에 대해 왈가왈부하려고 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 이 유령을 다시 깨워 새 옷을 입히려 한다면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한 번 허깨비의 핫바지를 홀라당 벗겨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여 : 근대미학의 덫에 걸린 미술장식

도심 속의 환경공해조각이라는 비난을 받기까지 하는 미술장식품에 관한 비관적 리포트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한 얘기가 됐다. 미술장식품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수의 작가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좋은 작품을 세우려고 애썼을 것이며, 적지 않은 선량한 건축주도 가급적 좋은 작품을 유치하려고 욕심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온정을 가지고 보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결론은 미술장식의 명확한 한계 상황이다. 무엇이 미술장식품에 대한 평가를 이토록 참담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가? 그 해답은 근대성의 덫에 걸린 미술장식품의 미학적 결여에 있다. 미술장식이라는 개념은 근대성의 분화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더니즘 예술의 이념으로부터 탄생했다. 특히 ‘건축물’ 미술장식이라는 명명은 이러한 정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축물을 미술품으로 장식하겠다’는 개념은 근대성의 본질인 체계적인 영역분할에 따른 기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이것은 건축물이라는 선행 결과물에 미술장식품이라는 후행 첨가물을 부가하는 절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건축과 미술의 만남을 상호 협업의 개념이 아닌 주종관계나 선후관계로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심각한 장애요소를 만들고 있다.
미술장식품은 근대적인 미술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구 모더니즘을 학습하면서 동시에 극복을 모색하던 시기에 탄생한 이 제도는 자폐적인 미술언어의 재생산을 구조화하는 데 기여한 우리사회의 예술 이념이자 관행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적 개념의 미술, 즉 모더니즘 미술은 전문화 과정의 소산이다. 모더니즘 미술은 체계적 영역분할로 규정되는 근대사회의 분화 과정의 소산이다. 건축으로부터 독립한 조각과 회화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건축과 한 몸이었던 조각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근대조각의 역사를 써왔으며,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벽면을 장식하던 그림이 외광을 쐬며 근대회화의 신화를 이룩했다. 모더니즘 미학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환원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예술적 소통이 부재한 채 시민사회에 일방적으로 강요된 언어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미 우리사회는 아직 덜 채워진 근대적 합리성을 전취해나가면서 동시에 탈근대적인 인식과 실천적 층위의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장식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근대적 미술개념의 오류에 입각해서 공공 영역에서의 미술을 소외시키고 있다.
광화문 네거리 한쪽에 있는 고종황제칭경기념비각은 기념비를 둘러싼 건축과 조각의 결합으로 구성되어있다. 그곳에는 서예와 전각과 목조건축과 조각이 한데 어우러져있다. 이것이 전근대적인 인식과 감성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 통합의 시선이다. 반면에 그 앞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거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조각 오브제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동해서 서울역으로 이동해보자. 신축 서울역사 앞의 공공미술 작품은 역사 내부의 벤치들과 달리 인근 공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벤치의 기능성을 넘어서 미술작품의 예술적 자율성에 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은 스트리트 퍼니처와 결합한 조형물의 좋은 사례로 손꼽힌다. 작품의 의미와 더불어 사용의 맥락이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미학 개념을 넘어 탈근대적인 예술의 맹아를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사례를 매우 드문 예이다. 기능과 의미의 결합이라는 공식을 단순하게 도용하고 있는 사이비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들 공공성과 탈근대성을 운운하는데도 과거의 관행이 반복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미술장식 제도가 안고 있는 근대적 사유와 관행의 한계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술장식품이 미학적으로 조야한 것은 개별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술장식이라는 설정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건축과 미술의 협업, 미술과 장소의 만남, 역사와 작품의 동행, 생태와 미술의 공존, 예술과 의제의 결합을 가로막고 있는 악의 근원이다. 따라서 미술장식이라는 개념은 예술의 공공성을 오도하고 있다. 그것은 공공장소에서 공적인 재정으로 공적인 의제를 다루는 예술적 공공성과는 다른 논리로 움직이면서 건축물과 미술작품(장식품) 양자 간의 어색한 만남을 주선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술장식의 결여는 근대적 예술개념의 결여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술장식이 이념적으로 결여한 통합의 정치학을 갈구하는 일일 것이다.



파산 : 부조리를 재생산하는 제도

미술장식의 제도적 문제는 다소간의 보충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결여의 수준을 넘어 파산의 지경에 이르렀다. 예술가 지원과 도시환경 미화. 이 두 가지 목표는 미술장식제도를 만든 가장 큰 명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목표는 미술장식의 미학적 결여와 제도적 파산으로 인해 실종상태에 이르렀다. 분배의 정의를 상실한 부조리한 시장논리로 인해서 증발해버린 예술가 지원이라는 취지는 이 제도의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가장 큰 당위 가운데 하나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현실은 미술장식에서도 마찬 가지다. 도시의 시각환경을 미화한다는 애초의 목표는 이미 실효를 상실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미술계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잘 만든 작품일지라도 작품의 보존과 관리 수준에 따라 죽고 산다. 동일한 작가의 작품도 관리 측의 관심 여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요즘은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과거에 세워놓은 작품들 대다수가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 작품 보존과 관련한 제도도 없고, 체계적인 작품 관리 시스템도 없이 실행되어 온 미술장식 제도는 이제 제도 자체의 존폐 여부를 검토해야 하는 시점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한두 가지를 손질해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상호 중층적인 구조 속에 얽혀있다. 따라서 아래에서 언급하는 제도적 파산의 낱개 항들은 지역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그 완급과 경중이 있다는 점을 전제해두고자 한다.
미술장식 제도가 실패 일로를 걷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끊이지 않는 실행상의 비리 문제”이다. 미술장식제도를 두고 벌어지는 협잡은 이 제도의 존폐 여부와 생명을 함께 할 것이다. 특히 일부 문화권력자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협잡은 매우 심각하다. 관료사회와 밀착한 일부 세력은 미술장식 제도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깊숙이 빨대를 꽂아 두고 모든 프로젝트에 사사건건 관여하여 이권을 챙기고 있다. 이런 일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을 넘어서서 공공연한 관례로 굳어져 있다. 건축주는 이러한 부당함을 알면서도 준공검사를 얻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협잡의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러한 관행에 참여한 일군의 구성원들은 단단한 먹이사슬의 구조를 구축하고 진을 치고 앉아서 땅 짚고 헤엄치듯 미술장식 제도를 이용해 이권을 챙긴다. 특정 도시의 미술장식품 대다수를 한두 작가가 독식했다는 얘기는 신화 속의 한 구절이 아니라는 점, 그 작가가 서식처를 옮겨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꺾이지 않는 꺾기의 관행”도 큰 문제이다. 현재의 법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꺾기는 꺾이지 않는다. 꺾기는 브로킹과 컨설팅이 구분되지 않는 중개자 집단에 의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건축주에 의해 원천적으로 세팅된 메뉴이기도 하다. 꺾기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50%를 넘어서 60%까지, 심지어는 그 이상까지도 꺾이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프로젝트를 수임하는 작가들의 현실은 구조악을 넘어서 개인의 윤리 마저도 짓밟는 파렴치한 짓이다. 이것이 발주자와 중개인과 작가의 3중 연쇄고리에 얽힌 꺾기의 현실이다. 꺾기가 꺾이지 않는 이유는 미술장식 제도를 공공미술의 관점에서 사고하지 않고, 시장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관점은 이윤추구를 지극히 정당한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시장은 합리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일 때만 가능하다. 미술장식품 시장은 이미 합리적인 규칙이 적용불가능한 게임의 장이다. 이윤추구를 달성하는 과정의 합리성은 결여가 아니라 부재의 수준에 가깝다.
미술장식 제도는 분배의 정의를 상실했다. “소수가 독점하는 1천억 시장”은 창작활동의 번외로 취급되고 있다. 미술장식제도는 예술가의 창작을 지원하기 위해서 생긴 제도이다. 1천억 시장이면 수천명을 먹여살릴만한 규모이다. 1억짜리 작품 1천개, 5천만원짜리로 치면 2천개의 작품이 한 해 동안 남한사회 곳곳에 뿌려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수치상의 논리로만 본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전혀 황당한 셈법도 아니다. 만약 분배의 정의가 실현된다면 연간 수천명의 작가에게 어렵게라도 생계를 유지하면서 작업에 전념하도록 할 수 있는 규모이다. 소수의 독점 현상은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경쟁우위를 지켜 배를 불리라고 만들어 놓은 제도가 아니다. 그나마 그 알량한 미술계 문화권력이 시장독점과 직결되지도 않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작업은 거의 안하면서 전문적으로 미술장식 프로젝트에만 매달리는 직업적인 미술장식가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은 건강한 미술생태를 저해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 제도가 작가의 창작지원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논리가 다수의 작업하는 작가들로부터 호응과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술장식품은 심의를 통과해야만 설치될 수 있다. 심의.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얽힌 난맥상은 정말 대책이 없다. “기준없는 심의제도로 인해 발행하는 난맥상”은 거의 무뇌아 수준이다. 최근에 한 도시의 장식품 심의에서 유력한 공공미술관이 초대전을 연 모 작가의 작품이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특정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연 작가라고 해서 장식품의 후보로 올라간 후보작이 무조건 통과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그 작품이 그 초대전에 출품된 대표작이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무리 추론해 봐도 그 작품이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심의에 참여한 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미술현장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외에는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비단 이 사례뿐만이 아니더라도 들쑥날쑥한 심의위원 구조는 최선을 다해서 좋은 작품을 세우려는 작가들에게 노심초사를 넘어서 노이로제를 유발할 지경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심의와 관련한 웃지 못 할 뒷얘기들은 몇몇 인사가 모여서 작품의 가치를 평가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오류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미학적 하향 평준화를 불어오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예술적 창의력과 상상력을 저해하는 무능한 전문가들의 심의를 받느니 차라리 시민들로부터 인기투표를 받는 게 낫겠다는 푸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실행상의 비리와 꺽기의 관행, 분배의 부조리함, 심의제도의 난맥상 등 미술장식제도를 둘러싼 문제의 지점들은 앞서 말했듯이 다차원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을 배태한 가장 큰 문제는 예술정책의 한계에 있다. 공공영역의 예술소통을 자본가에게만 떠넘기고 있는 국가권력의 무책임과 무능은 불행의 씨앗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 공공미술을 제도적으로 안착시키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민족기록화 프로젝트를 통해서 국가 차원의 프로파간다를 양산하거나 전쟁영웅이나 반공투사를 부각하여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얄팍한 술수를 부려왔을 뿐, 정부기금을 사용해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았다. 반면 한국의 자본가들은 정부의 여백을 메우며, 미우나 고우나 미술장식 제도를 통해서 미술작품을 공공의 장소에 노출시키는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수행해 왔다. 이제 전환의 지점에 서있다.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소통을 민간 건축주에게 전가해온 대한민국 정부의 예술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그 과정의 중요한 매듭이 오늘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 있는 미술장식을 넘어서는 공공미술의 법제화가 아니겠는가.

* 위의 글은 아래의 긴급포럼 발제문임을 밝힙니다.

"상정된 공공미술 개정안의 쟁점과 대안" (공공미술법안 관련 긴급 포럼)

- 주최 : (사)미술인회의, 문화연대,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실
- 일시 : 2007년 3월 29일(목) 오후 2-5시
- 장소 : 국회 간담회실(125호)

http://www.gimjung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