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미완의 미술제도를 둘러싼 법제도 현안
김준기
2008-06-01

미술정책은 반드시 법률적 바탕에 근거해 설정하고 운영돼야 한다. 따라서 현재보다 미래를 위한 정책 입법안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또한 정책입법은 미술의 인프라 구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많은 논의와 토론을 거치게 마련이다. 이에 현재 이슈가 되는 법안 혹은 정책적으로 입법이 요구되는 바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법제도는 사회적 합의나 관행을 일관된 규칙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미술이라는 체계는 근대 시기를 지나면서 예술가의 자율성에 입각한 공공의 영역으로 제도화했다. 문제는 한국의 근대 시기가 역사적 순리에 따른 진화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서구화와 식민화 과정을 통해서 이식되었다는 데 있다. 미술문화도 마찬가지다. 시민사회의 성숙한 합의와 미술문화를 향유하는 관행이 부족하거나 부재한 상태에서 문화선진국 수준의 제도를 만들다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원천으로 하는 미술은 언뜻 보면 법과 무관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이야말로 매우 민감하게 법적인 규정 안에서 작동한다. 미술은 법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지식활동을 통해서 공공영역을 형성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술은 고정불변의 가치이기를 거부하며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유기체이다. 법제도는 끊임없이 변동하는 예술적 가치의 경쟁을 규정하는 토대이다. 따라서 2008년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 안팎의 법적 현안이 무엇인지를 점검해보는 일은 우리시대 미술의 관행과 제도를 두루 관통하는 화두이다. 국가단위의 예술정책과 개개인의 취향에 이르기까지 미술을 둘러싼 법제도상의 문제는 우리가 합의하고 인정하는 가치 정향의 준거를 이룬다. 예술생산과 매개, 향유에 이르는 일련의 틀을 법현안의 관점에서 조망해봄으로써 지속가능한 것과 손질해서 고쳐쓸 것들을 분간하는 일이야말로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관점으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예술의 장을 성찰해보는 창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난 10년간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로 이어진 정치권력이 이명박 정부로 이양된 마당에 지난 시기의 공과를 들여다보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새로운 논의의 장을 열어야 할 당위 또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현안 가운데 다음의 몇 가지는 정권교체와 맞물려 향후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인지 주목을 요한다. 공급자 중심에서 향유자 중심으로 변동했던 예술정책의 관점에서 문화예술진흥법의 사안들은 그 기조를 유지할지 아니면 과거와 단절하고 역행할지가 관심사이다. 미술관을 둘러싼 복잡한 현안들도 성숙한 미술문화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논의이다. 공공미술을 둘러싼 법적 공방 또한 지난 몇 년간의 논쟁점이었지만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예술노동의 사회적 교환방식에 관한 미성숙한 관행과 합의 수준 또한 장단기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문화예술진흥법은 가장 큰 틀에서 미술제도를 둘러싼 현안을 담고 있다. 국가단위의 예술정책 전반을 규정하는 법적 근거가 특히 그렇다. 그것은 예술생산을 어떤 지위에 배치할 것인지, 예술향유를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할 것인지를 두루 관장하는 성문법이다. 문화예술진흥법은 국어사용, 문화시설의 설치와 이용에 관한 전반적인 정책, 예술가(단체) 지원 방안, 문화지구, 공공미술, 문화예술진흥기금 등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들을 다루고 있다. 지난 노무현정부 시절부터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문화예술진흥법은 예술의 생산은 물론 기획의 영역까지 문화산업의 범주에 포함시켜 대대적인 구조 변동을 모색했다. 심지어는 예술의 산업화라는 이슈로 공개적인 논의장이 열리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은 상품이라는 가치를 통해서 교환된다는 기본전제에서 예술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논리이다. 예술이 공공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문화산업 또는 예술산업이라는 국가단위의 기획 앞에서 궁지에 몰려있다. 예술생산과 향유를 국가단위에서 기획하고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을 공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문화산업이나 예술산업의 논리야말로 국가가 견지해야 할 문화와 예술영역에 대한 공공적 역할을 방기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을 지적하는 견해도 많다. 특히 공급자 중심의 예술정책에서 향유자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기조와 문화/예술산업 논의가 얼마나 설득력있게 만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예술생산과 향유를 산업의 논리로 풀자는 발상이 예술 콘텐츠를 공공의 기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로또복권으로 충당하면서 국고를 줄인 점, 문화예술위원회의 종자돈을 헐어서 기금으로 운영한 점, 국가단위 예술기관들을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한 일 등은 자본의 논리로 예술영역을 홀대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문화향유 권리, 결국 법제도 개선에 달려있다

최근 이명박정부에 들어와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민영화하겠다는 논의까지 나오고 있어 미술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 미술관 제도를 뒷받침하는 틀은 박물관미술관진흥법(박미법)이다. 미술관은 근대체제 이후 활성화한 대표적인 공공영역이다. 미술작품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공유재산을 모아서 잘 보존하고 연구해서 보여주고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미술관 기구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박미법이다. 그러나 박미법은 날로 늘어나는 미술문화의 중요성을 포괄하기에는 너무나 엉성하다.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도서관법이 도서관의 전문가인 사서와 관장의 자격 기준을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서, 박미법은 ‘큐레이터를 두어야 한다’가 아니라 ‘둘 수 있다’고 규정하는가 하면 디렉터의 자격에 관한 규정이 없어 인적 전문성 확보 자체가 느슨하다. 게다가 큐레이터 자격증을 만들어서 현실에 맞지 않는 파행을 낳고 있지만 커머셜 아카데미즘과의 야합을 통해서 구조악을 반복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지원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가 최근 몇 년에 걸쳐 활성화하고 있는 사립미술관 관련 정책 또한 보다 성숙한 논의가 필요하다. 풀뿌리문화를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사립미술관에 관한 규정을 보다 명쾌하고 투명하게 제도화해야 한다. 사립미술관을 지원함으로써 공공기제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확립하는 일에 있어 국가와 사립미술관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설정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렉터와 큐레이터의 업무분장을 명문화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우리의 미술관 문화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대변하는 얘기다. 공공미술관 논의는 언제나 미술계 전체의 커다란 숙제이다. 행정직과 전문직의 관계, 디렉터와 큐레이터의 관계, 미술전문가와 시민대중의 관계 등을 둘러싼 갈등과 간극을 메우기 위해 보다 섬세한 논의와 법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최근에 한 지자체는 공공미술관의 관장을 공모제가 아닌 추천제로 바꿔서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그 실행 가능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책임운영기관화에 이어 터져 나온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영화 논의는 안 그래도 팍팍한 미술관 문화에 심난한 고민을 던지고 있다. 그 위험천만한 발상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차라리 행정직과 전문직 사이의 갈등을 없앨 수 있다면 민영화도 생각해볼 만하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공공미술관을 민영화하는 것은 수백년 동안 미술관문화를 다져온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경기도미술관이 경기문화재단 산하로 통폐합된 이후 예산과 인력, 운영구조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예의주시하고 그 가능성과 문제점을 따져 물어보고, 구조변동 이후 인력과 재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미술문화의 허약한 토대 위에서 민영화가 과연 가능할지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사업소로 존재하는 공공미술관은 안정적인 구조의 독립법인으로 거듭나야 하지만 그 시점과 방법의 선택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미술법 또한 지난 수년간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입법현안이다. 문화부가 주도해서 의원입법으로 발의한 이 법안은 몇 년간의 계류상태를 거쳐 거의 사멸하는 분위기다. 아무도 그 법안을 다시 꺼내서 테이블에 올릴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게다가 2007년 초에 난데없이 등장한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 발의의 일명 짝퉁 공공미술법은 무늬만 공공미술이지 내용은 기존의 미술품 장식에 대한 법안과 유사한 퇴행적인 내용이어서 세간의 빈축을 샀다. 1984년에 문화예술진흥법의 규정으로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을 의무화한 이래 지난 20여년 동안 도시 공간 곳곳에 조각을 비롯한 미술작품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법제도는 미학적인 결여와 제도적 파산 선고를 받은 지 오래이다. 더 이상 신선한 자극을 주지 못하고 비리와 부정의 온상으로 낙인 찍힌 이 미술장식품제도를 공공미술제도로 바꾸자는 논의가 시민사회의 여망과는 무관하게 관계자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좌초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미술계가 정말 진지하게 반성하고 풀어야할 숙제이다.

예술노동의 사회화는 미술제도의 완성을 위한 최대 과제이다. 그것은 미술인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문제로 직결된다. 미술인들이 우리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따져 묻고 그들의 예술노동을 정당하고 합리적인 소통구조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제도로써 예술가 연금법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2005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구본주 사건의 악몽은 여전히 우리 미술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져있다. 정말 아무런 대책 없이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고학력저소득층 예술가들을 무직자로 간주하는 현실은,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부르짖는 한국사회의 치부이다. 예술가를 무직자로 규정하는 세태는 아직 우리사회가 예술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만큼 우리가 예술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은 당연히 예술작품이라는 상품을 화폐와 교환하는 것이다. 그 방식을 담고 있는 것이 미술시장이다. 활성화 일로를 걷는다고 환호성치고 있지만, 다수 미술인에게는 남의 얘기다. 최소한의 시장합리성마저 결여한 덕에 많은 예술가는 정상적인 경제적 활동을 유보한 채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해가 바뀔 때마다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작가는 도태되고 결국 (시장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살아남아 예술가로 생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에게 시장 척도가 전부는 아니라는 보수적인 시각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낙후한 미술시장에 의존해서 예술가의 명운을 가늠할 것인가. 유럽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예술가 사회보장제도, 시장합리성 확보와 시장활성화 논리로 갈려 결국은 유보했던 양도소득세 문제, 예술향수와 관련한 세제정비 등 법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예술의 생산과 향유 제도를 합리화해야 한다. 자율의 이름으로 방치한 예술노동의 사회화를 실현하는 일, 이것이 바로 양적 증대를 질적 변화로 견인해야 하는 문화의 세기 한국미술계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현안이다.



출처: 『월간미술』281호 (2008년 6월), pp. 113-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