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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소통으로 완성되는 공공미술, 공공디자인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부
2008-08-01

public art of world
_참여와 소통으로 완성되는 공공미술, 공공디자인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부(www.artinpost.co.kr)

최근 방한한 ‘카스퍼 쾨니히(Kasper Koenig)’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공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시민 참여를 꼽았다. 시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건 ‘작품의 질’이라며 도심에 덩그러니 특이한 작품 하나 가져다 둔다고 해서 그걸 공공예술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공공’이라는 미명하에 ‘예술’의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저질 작품이 도로를 점령하는 것은 공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의 표현은 우리 현실에 반추할 때 시로 다양한 예를 연상케 한다. 과연 우리의 공공미술, 현재 불고 있는 공공디자인이 ‘카스퍼 쾨니히’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수천만 원에서 수천억 원이 넘는 혈세를 사용하지만 왜 공공미술, 혹은 공공디자인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조차 미비하고 일부 전문가(또는 미술가)들에 의해 주도될 뿐 소통의 다른 한편인 시민들의 참여율이 뚜렷하다는 증거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작금의 화두인 공공디자인의 경우 오히려 서울시 상징물 ‘해치’논란에서 드러났듯 합의와 조율, 의견청취가 미약해 일방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들조차 폭넓은 인지성은 물론 심미성, 독창성, 기능성 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 게 드물다. 반면 공공디자인이 앞서 있는 서구는 사람, 자연, 문화를 모토로 ‘양보다 질’을, ‘인공보다 자연스러움’을, ‘겉보다 속’을 지향하고 있어 변별성을 갖는다. 참여와 소통이라는 ‘공공’의 본질이 배어 있음은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외국의 경우 공공미술, 아니 요즘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공공디자인은 어떠한 모습으로 탄생되었을까?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되돌아본다.

다시 보는 외국의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
영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딜 가도 무척이나 심플하게 디자인화 되어 있는 거리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영국의 거리 디자인은 각양각색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퍼블릭 퍼니처(Public Furniture)의 벤치, 가로등, 표지판, 공공조형물, 환경시설물 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시민들에게 편의는 물론 안락함과 시각적 만족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런 영국에서 요즘 공공디자인을 하나의 창조산업으로 육성, 지원하고 있어 크게 주목 받고 있다. 1980년대 초 당시 수상인 마가렛 대처의 강력한 디자인 정책에 탄력 받은 이후 “세계의 디자인 공장”으로써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아 온 영국은 특히 1997년 토니 블레어 총리의 ‘창의적 영국’이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한 ‘멋진 영국’ 만들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디자인 런던(Design for London)’ 프로젝트를 발표해 공공디자인 활성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결과 영국은 디자인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만 현재 1조 5천억 원이 넘어서고 있으며 전체 GDP의 8% 정도가 창조산업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유럽 최고의 공공디자인 선두국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특별한 점은 영국 런던의 경우 기존 건축물에서 나온 폐자재들을 버리지 않고 대부분 재활용하는 ‘친환경 에코(eco)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의식 없이 금방 뜯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밀어붙이기 식 공공디자인이라는 눈총에서 멀리 있지 않은 우리의 공공디자인 정책이 일부분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공공미술과 디자인을 효율적으로 접목한 일본은 이미 30여 년 전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과 혜택에 힘입어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왔다. 동경을 중심으로 일본 어디에서든 공공미술과 결합한 공공디자인의 영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일본의 경우 주민들과의 합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실제 롯본기나 파레 다치카와, 가나자와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아트 벤치, 재미있게 구성된 승강장, 기능성과 작품성이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도시 시설물들은 예술가와 도시디자이너, 그리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시민들과 합의된 작품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여러 도시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공디자인 사례를 꼽으라면 미군기지로 사용되었다가 반환되어 새롭게 조성된 상업지구인 ‘파레 다치카와’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이후 ‘도쿄도’는 파레 다치카와 재개발 비용 10억 엔 중 0.3%를 투자해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110여개를 설치했으며 각종 건축물을 주변 환경에 맞게 리모델링함으로써 도시를 하나의 아트벨트로 꾸미는 실험적인 정책을 내놨다. 이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심미성, 독창성, 기능성은 물론 주변 환경과의 조화, 랜드 마크로써의 역할 등이었으며 이들의 실험은 성공해 우리나라를 포함해 현재 세계 많은 나라로부터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바다 건너 싱가포르는 예쁜 도시를 디자인하기보다 다음 세대까지 사랑받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퍼블릭아트」에서 만나본 문화예술청장의 “동시대에 흡족한 계획(디자인)이 미래에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는 발언은 그것을 명징하게 증명한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거의 관 주도형이라는 특징 아래 국가 자체가 하나의 규범적인 계획도시답게 공공디자인 역시 철두철미하게 이뤄지고 있다. 정부가 공공의 영역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불필요한 예산을 줄이고 환경에 어울리는 적절한 디자인을 이끌어 내는 시스템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공공디자인이 지닌 차별성은 무엇보다 옛 것에 대한 가치를 소중히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외향의 ‘가시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 사이 이들은 ‘오래된 것을 살리는’ 방향에서 공공디자인을 설계하고 이것이 거주민들의 삶에 조용히 스며들도록 한다. 예전 국회의사당이나 감옥, 경찰서 등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 아트 스쿨을 비롯해 각종 사립미술관, 공공기관으로 활용해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현대미술과 세련된 디자인을 철저히 이입시킴으로써 그들만의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싱가포르의 공공디자인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모토는 ‘인간적인, 그러나 친환경적인 것’
세계 최대의 강국이라는 미국은 자유경제 체제가 가장 잘 구현되어 있는 국가답게 완전 경쟁체제를 통해 공공디자인 진흥을 도모하고 있다. 미국은 퍼블릭 스페이스(Public Space), 퍼블릭 사인(Public Sign), 퍼블릭 퍼니처(Public Furniture), 퍼블릭 아이덴티티(Public Identity) 등 세분화 되고 전문적인 체계를 통해 공공디자인 발전을 위한 공공성격의 진흥사업을 고수해 오고 있는데, 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겉보다 속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다.’에 있다. 멋지고 화려하게 포장된 건물이나 교량, 항만, 생활시설물로 아름다운 도시를 꿈꾸기보다 기존의 문화나 역사를 이용한 ‘속이 꽉 찬’ 디자인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뉴욕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는 각종 그라피티는 혼돈 속 질서를 부여하고 현대미술의 메카답게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나 클레스 올덴버그의 모뉴먼트들이 랜드 마크로써 기능하도록 한다. 지역 간 거주민들의 특성을 반영한 지역적 특성도 눈에 띈다. 육가공업체와 명품 숍이 오버랩 되어 있는 맨해튼의 미트패킹지역이나 미국 역사의 증지이자 신구의 조화가 이채로운 버지니아, 항구와 도시의 이질감이 오히려 독특한 공공디자인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로스엔젤레스, 이밖에도 허쉬온 박물관 조각공원과 N.G.A공원 등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조각공원들이 인상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워싱턴 D.C 등은 인간의 삶과 질이 공공디자인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는지 잘 드러난 예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번잡하고 교통지옥으로 연상되는 미국이라지만 그들의 공공디자인 만큼은 자동차나 권위적인 건축물이 아닌 ‘사람, 자연, 문화’ 등 도시의 원래 주인을 위한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 파리 ‘라데팡스’의 공공 조형물들. 형형색색 ‘니키드 생팔’의 작품이 관광객들과 도시인들의 피곤함을 희석시키고 파리와 위성 도시의 소박한 디자인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감지되는 예술의 향기와 어우러져 그들만의 고유한 색채를 띤다. 이 나라 공공디자인의 기본 골격은 퍼블릭 아이덴티티(Public Identity) 구축에 있다. 공공의 개념과 공간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 정체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 그들 공공디자인의 핵심 언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루브르나 퐁피두센터, 마르세이유 기록보관소 등은 실제로 프랑스의 공공디자인의 바람이 빠른 시도와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공공의 주체인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도시 디자인’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거리에 넘치는 스트리트 아트들은 소시민들의 삶을 대변한다.
미국의 ‘빅애플(big apple)’처럼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상화하는 것은 동의된 보편성을 근간으로 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도시디자인’이라는 것 역시 관념적이며 또한 매우 추상적이지만 프랑스는 이를 문화 소외에 대한 인식을 최소화 하고 모두가 함께 영위할 수 있는 도시를 계획하는 것으로 실체화시키곤 했다. 역사적으로 예술적 영감이 되어온 자연환경들과 ‘오르세’처럼 재생공간을 고스란히 보존, 활용하되 각종 아트가 접목된 디자인을 통해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거나 현대미술작가들을 끌어 들여 건축물과 시설물에서 새로운 공공언어를 창출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미적 가치를 도시인들에게 스며들도록 한 후 삶의 패턴을 보다 예술적으로, 보다 행복하게 바꾸는 데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과 프랑스 외에도 주목 받지 못했던 경제도시를 공용 버스정류장 디자인을 새롭게 만들어 세계적인 명소로 거듭난 독일 ‘하노버’나 대대적인 벽화 정비 사업으로 공공디자인의 저력을 드러내고 있는 멕시코, 친환경적인 디자인으로 지속가능한(sustainable) 도시를 일궈내고 있는 덴마크, 브라질, 오스트리아 등이 그 적절한 예로써 부족함이 없다. 이들이 공공디자인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얻은 유무형의 혜택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에 고유의 특질들은 현재에도 더욱 견고해지는 추세다.
어쨌든, 매우 오랜 시간 양적, 질적 팽창을 거듭한 세계의 디자인도시들과 그 도시정책을 이끌고 있는 나라들이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친환경적인’ 공공디자인으로 모아진다. 여러 곁가지가 없진 않으나 ‘사람 중심’의 공공디자인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 사례는 지나치게 정치적 냄새가 강하고 포장을 중시하며 동시에 단기간에 어떤 성과를 내려는 감이 많은 우리나라가 한번 쯤 고찰해봐야 할 대상들이 아닌가싶다.

출처: 『월간 퍼블릭아트』23호 (2008년 8월), pp. 124-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