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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공공성과 사사성 사이의 미술
김준기
2007-12-19

▲박기원의 _‘자’(좌) , 이승복 동상과 스프링(우)

공공(公共)이라는 말은 사사(私事)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과 연관된 미술이라는게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것인지를 회의할 여유조차 없이 공공미술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매우 기본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공공미술은 공공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미술이며, 공공의 기금으로 이뤄지는 프로젝트이고, 공공의 관심사를 주제로 하는 미술이다.
공공미술은 20세기 미술, 즉 창의적인 예술가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여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일탈한 전문화 과정에서 탄생한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미술이 더 이상 도식적인 전문공간에서만 통용되는 폐쇄적인 언어에 머물러서는 안되겠다는 인식이 미술의 공공성을 고려하는 발상의 전환을 불러왔다. 그것은 근대를 반성하는 탈근대적인 전환이며, 미술의 영역을 닫힌 공간으로부터 열린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기도 하다.
공공미술은 새로운 공공미술로 진화하고 있다. 그것은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예술적 활동을 포괄한다. 국가기구나 언론매체가 유포하는 공공영역이 아니라 예술이 매개하는 공론의 장. 바로 이것이 새로운 공공미술이다.
공공을 형성하는 구성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는 성질이 공공성이다. 그런데 이 공공성이라는 것을 해석하는 미술의 시각은 단선적인 논리를 거부하데 그 참맛이 있다. 공공성이라는 이름은 때에 따라서는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사성을 제거하기도 한다. 예컨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단위의 공공성은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에게 미군기지의 확장이전을 위해서 삶의 터전을 비워주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전국의 수백수천개의 마을 가운데 하나인 대추리의 사사성은 국가단위 공공성을 위하여 희생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추리 내부에서의 공론장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마을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그 마을을 지키는 데 합의했다.

▲이윤엽-대추리기념관

이 경우 국가의 공공성과 대추리의 공공성은 힘의 관계에 의해 균형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힘의 불균형 속에서 예술공론장을 형성하며 현장에 개입하고 참여한다.
대추리에서 벌어진 현장예술활동은 공공성에 관한 예술가들의 시각을 잘 보여주었다. 진정한 공공성은 배타적인 객관성이 아니라 상호 주관성에 입각한 민주적인 소통의 장으로서의 공공영역을 염두에 두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공미술이다.

▲서울역사 내부의 조형물

2006년은 공공미술 원년이라고 언급될 만큼 폭발적인 붐이 일었던 해이다. 2006년에 시작해서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문화부 주최의 아트인시티 프로젝트나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안양시의 안양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한국 공공미술이 머물러 있는 단계는 기존의 미술장식품 개념을 벗어나서 장소성과 의제의 맥락을 타야한다는 합의가 퍼져나가고 있는 수준이다. 유럽에서는 공공미술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그 대신 프로젝트라는 말을 널리 공유하고 있는데, 예술행위를 특정한 장소나 의제에 맞춰서 전일한 기획 체제로 진행하는 일을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공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중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폭발적인 붐업이 아니다. 미술을 가지고 얼마나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게 대사회적 소통체계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데 있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공공성의 이름으로 미술의 대사회적인 지위와 역할을 재규정해야할 시점을 맞고 있다.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었고, 매우 풍부한 문화적 자산들을 쌓아가고 있다.

▲정동길 프로젝트-라디오 정동



출처 : 《여성신문》, 2007년 10월 17일

글 | 김준기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