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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미술 설치의 당위성 1
이경모
2007-12-18

▲백현옥 <대한항공피격희생자 위령탑-천안망향의 동산> 1984
백색화강석+청동, 5000*3500*2690

문화가 외부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환경 결정론’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인간 삶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건축이나, 공동체를 유지·존속시키는 식(食)문화, 그리고 인류의 지적 욕망을 채워준 예술 등은 모두 생태·환경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반영되어 왔다. 따라서 환경은 개인의 전유물이거나 소수집단의 것이 아니라는 말의 권위를 부여받고, 여기에 미술의 특징인 공공성이 더해져 환경미술이라는 분야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오늘날에는 미술품을 단순히 개인의 창작물, 또는 소유재산 차원에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문화유산으로 국가이미지 및 경쟁력 제고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공개념’차원으로 접근·해석·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공공미술(Public Art)로서의 환경미술의 현황을 건축 및 도시공간과 관련지어 살펴보고, 이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백현옥 <대한항공피격희생자 위령탑-추모의 장> 1984
브론즈, 500* 100* 200

환경미술의 태동 미술은 그 태동부터 공공적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그림이라는 것을 그렸을 때 그들은 이것을 삶을 지탱하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그렸고, 그 그림 앞에서 그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알려져 있다). 고대 신전건축이나 공공시설물을 지을 때는 건축가와 미술가가 늘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할 당시 익티누스와 피디아스의 경우를 비롯하여 중세나 르네상스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제대로 된 건축물의 경우에도 설계단계부터 미술가가 동참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우는 모더니티라는 새로운 힘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무자비한 파괴와 생성의 동력으로 전통적 생활양식과 도시형태를 허물고 획일적 형식의 건축물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이미 깨져 있었다.
단지 공공성이라는 명분과 경제적 이해에 따라 박스형 건물들 사이에 인위적인 공간을 마련하고 그 위에 모더니즘의 담론 하에 제작된 거대한 추상조각을 끼워 넣음으로써 미술의 공공성 본래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이 보였다. 즉 기능성을 최우선으로 함으로써 ‘상자 속의 국제양식’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아온 현대건축물의 무미건조함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옥내외에 환경미술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건축물이나 도시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미술품’으로 화장한다는 의미로써, 모더니즘 건축이 금기시하였던 장식의 문제를 미술품을 통해 장식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시킨 형국이 된 셈이다. 이는 또한 예술이란 개인의 자율에 의거한 결과물이며 그 감상 역시 개인의 특수한 미적 취향에 달려있다는 모더니즘 미학이론의 좌표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모순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귀속되기보다는 집단적 가치관의 부정에 자신을 정초시키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이 공공미술에 적극성을 보여 왔다는 사실은 하나의 아이러니처럼 비쳐진다.
어쨌든 간에 20세기 초부터 일기 시작한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은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나 러시아의 부흐테마스(VKHUTEMAS)와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자기 확장을 시도하며 건축과의 밀월여행을 단행하게 된다. 기념조각(monument)이나 벽화 등의 형태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공공미술 프로그램은 1970년대에 이르러 다시 ‘건축 속의 미술(Art in Architecture Program)’으로 귀착된다.

글 | 이경모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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