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남산, 일상의 공간을 문화적 자산으로
신승수
2013-06-24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으로 시작하는 애국가 2절 속 ‘남산’이 서울의 남산인지는 몰라도, 배가 남산만 하다고 말할 때나 전국에 수십 개나 존재하는 동일지명을 봐서는 ‘남산’은 고유지명이라기보다는 우리 동네에 흔히 존재하는 남쪽의 산, 혹은 ‘앞산’을 뜻하는 친근한 단어다. 한편, 이처럼 전국 방방곡곡 마을 앞에 자리한 남산에는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나 보다. 서울의 남산만 해도 근 5만 주 가까운 소나무 숲이 여전히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서울의 남산은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해발 265m의 앞산이다. 2009년 ‘남산르네상스’ 계획과 더불어, 왠지 모르게 무언가 크고 거창한 ‘부흥’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산은 근래에 들어와 시민의 일상적인 휴식과 놀이의 공간으로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 남쪽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소나무 숲 속 양지바른 자리는 행복한 오후 한때를 보내는 연인으로, 순환로 주변은 산책하거나 운동을 즐기는 시민으로, 그리고 N서울타워, 팔각정, 식물원 등의 위락시설 주변에는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으로 붐비는 이 산은 친근하고 완만한 서울의 앞산이 틀림없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남산 일대에 최근 들어,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공공’의 모습을 탈피한 공공건축, 공공공간이 하나 둘 마련되고 있다. 이들 소나무 숲 속 공간은 단순하고 절제된 드러냄과 친근하고 일상적인 형태를 갖추고, 일백 년 ‘상징’의 공간 ‘남산’을 ‘일상’의 공간 ‘앞산’으로 되돌리고 있다. 수년 전부터 남산 자락에서 우리를 마중하는 이 공간을 찾아 걸어 보자.

 

 

‘기념’하고 ‘기억’하는 공간
서울역 맞은 편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에서 힐튼호텔 사이 조붓한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소월길과 소파길이 만나는 남산 회현자락 끝에 도달한다. 1960년대 이곳은 남산 어린이 놀이터가 있던 자리다. 현재는 2009년 발굴조사를 토대로 남산 끝자락을 여러 토막으로 끊어놓았던 옹벽을 헐고 도로를 덮어, 옛 남산 어린이 놀이터로부터 백범 광장을 거쳐 서울특별시과학전시관 남산분관(구 남산어린이회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능선이 복원되었고, 무너진 옛 성곽 일부가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마침 이곳에서 봄을 맞은 나들이객은 백범 김구, 성재 이시영, 김유신 장군, 안중근 의사 동상을 오가며 삼삼오오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성벽과 능선이 복원된 남산 회현자락

 


남산 자락에 11개나 세워져 있는 동상 가운데 유독 사연 많은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자리한 장소는 남산 회현자락의 중심공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전시관 남산분관 서쪽의 ‘남산 111계단’과 ‘삼순이 계단’으로 알려진 동쪽의 ‘남산분수대 계단’이 정점에 닿아 만나는 고갯마루의 한복판에 있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남산 도서관에 닿고, 북동쪽에는 남산분수대 주변 조경녹지가 있다. 이 금빛 동상을 중심으로 과학전시관 남산분관과 남산 도서관, 그리고 남산 분수대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동서남북으로 자리를 틀고 있는 형상이다.

 

백범광장에서 바라본 과학전시관 남산 분관(이광노 설계)과 N서울타워

 


특히,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70년 콘크리트 전통양식, 소위 ‘박정희 양식’으로 건립된 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헐고 2010년 새로 문을 열었다. 이 기념관을 설계한 부부 건축가 김선현, 임영환의 말처럼 “경건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드는 이 건축공간은 출입구를 감춘 채, 호기심에 이끌린 방문객의 발걸음을 울창한 소나무 숲 밑 미지의 공간으로 유도한다. 이 기념관은 육중한 형태의 석조건물도 아니고 웅장한 출입구를 드러내지도 않지만, ‘반투명 유리’(U글래스) 상자가 투과하는 부드러운 빛과 땅 밑으로 걸어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는 전이공간(명상의 길)을 가진다. 그래서 이 공간은 ‘기념’보다는 ‘기억’에 더 어울리는 따뜻함과 투명함으로 충만하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전경], 김선현&임연환, 2005

 


건축가는 무명지를 끊고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12인의 단지동맹을 상징하여 12개의 반투명 공간 기둥이 도열한 형상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한 명의 위인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뜻을 함께한 다수의 합의, 즉 ‘관계적 측면’에 초점을 두겠다는 생각이고 ‘오브제’가 아닌 ‘관계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결과적으로 건축가는 12개의 채 나눔으로 건물 전체의 스케일을 친근하게 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는 관계방식을 구사한다. 일련의 공간 기둥은 일견 모두 같은 모양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제각기 서로 다른 특성이 있어서 단정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예컨대 북서쪽 진입부와 남동쪽 소광장이 바라보이는 양편 모서리의 공간기둥은 각각 계단실을 포함하고 있어서 물건 대신 사람의 움직임을 전시한다. “건물을 바라보는 것도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던 건축가 고 정기용 선생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진입마당 앞 반투명 공간기둥 속에서 스며져 나오는 ‘安重根’ 세 글자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남동쪽 모서리 투명 계단실 바깥에 펼쳐진 한강변 서울의 풍경에 가슴이 시원하다.


내부 전시에 지쳐 나온 사람을 반갑게 맞는 것은 최만린 선생의 조각 <한얼 2010>이다. 전면 잔디 마당에 설치된 이 조각은 반투명한 공간 기둥과 함께 기념관 주변 영역을 충만한 투명함으로 물들인다. 이전 ‘O’(영)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없음’과 ‘비움’이 아닌 단순하고 절제된 최소한의 드러냄을 보여준다. 마치 ‘명상의 길’을 진입하면서 시나브로 사라지는 남산의 푸름을 뒤로하고 검은 벽을 따라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이 드러나듯이 단아하게…. 


일제강점기 조선신궁(1920년)이 건립된 장소. 그 상처를 덮기 위해서 남산 식물원(1968년)과 남산 어린이회관(1970년)을 세우고, 수많은 애국선열의 동상을 세웠던 상징과 기념의 공간 남산 회현자락. 이곳, 철거된 구관 뒤편 작은 공터에 물러나 앉은 신관 건물. 뒤로 물러나 스스로 배경이 됨으로써 소나무의 푸름을 머금은 투명함과 유묵의 깊은 단단함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기념의 공간인 동시에 공공공간이라는 이중적 상황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이 공간 기둥은 오브제보다는 크고 기념비보다는 작은 적절한 크기로 나뉘어 ‘앞산’ 앞에 역사의 기억을 끌어 올린다.

 

 

남산의 화장실, 가장 작은 단위의 공공건물
기념관을 뒤로하고, 남산 도서관을 지나 소월길을 따라 동으로 걷다 보면,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주한 독일문화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뜻 단층 갤러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건물 뒤로 경사진 남산 기슭을 따라 총 4개 층이 마치 계단에 걸터앉은 듯 숨바꼭질을 한다. 특히, 후면 공간을 감싸 내려가는 건물 오른편의 외부계단은 풍경을 희롱하며 걷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준다. 이 즐거움을 이어서 그랜드하얏트 호텔 앞까지 걸으면 육교 건너편 남산 야외식물원에 닿게 된다. 옛 남산 외인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에 마련된 넓은 야외 공간 덕분에 이곳 남산 한남자락은 많은 시민이 찾는 휴식의 장소로 탈바꿈되었고, 이에 그 한복판에는 2010년부터 멋진 화장실 한 채가 마련되어 방문객의 급한 발걸음을 기다린다.

 

주한독일문화원 외부계단에서 올려다 본 풍경

 


급한 용무 때문에 찾는 이곳은 묘하게도 느리고 한가로운 느낌이다. 완만한 오르막길 한쪽에 자리 잡은 이 화장실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산과 나무와 하늘에 슬며시 침투한다. 건축가는 노출콘크리트 외벽과 담을 사용하여 공간 프레임을 잡고 그 안에 소나무, 향나무, 느티나무를 주연 삼아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 공간 연출에 화장실은 단지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이 공간은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다.


남산 야외식물원 화장실은 건축가 김창균의 첫 작업인 동시에 그의 건축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의 건축에는 ‘장소’를 존중하고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지속해서 읽힌다. 여기 첫 작업에서 건축가는 남녀 화장실이 서로 마주 보는 전형적인 화장실 구성방식에서 벗어나 각각의 공간을 떼어내고 관입시켜 그 틈새로 자연을 끌어들인다. 남녀 화장실 사이의 열린 공간에는 뒤편의 향나무와 느티나무가 보이고, 여자 화장실동 중앙의 틈바구니로는 숲길의 나무와 사람의 움직임이 담긴다. 그리고 건물 앞에는 넉넉한 마당과 담과 벤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앉아서 쉬게 한다. 

 

 

[남산야외식물원] 화장실 전경, 김창균, 2010 

 


화장실과 그 주변 공간은, 건축가 자신의 말처럼, 산책로에 화장실을 만들었다기보다는 “화장실에 작은 산책로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남산 자락에 그가 설계한 4채의 화장실 모두가 전면의 마당은 물론이고 주변의 자연환경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있는 ‘길의 매듭’과 같은 공간들이다. ‘남산 야외식물원 화장실’, ‘남산 83 화장실’, ‘남산 장충체육회 화장실’, ‘남산 석호정 화장실’이 바로 이러한 숲 속 쉼터들이다.

 

남산 83 화장실은 야외식물원에서 수복천 약수터를 지나 N서울타워 방향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남쪽 순환로와 만나는 길모퉁이에 빗겨 앉아, 울창한 소나무 군락 사이로 산행에 지친 등산객의 쉼표가 되어준다. 특히 담과 화단을 사용하여 바닥에 다양한 높이 차이를 만들어가면서 지형의 높낮이에 자연스럽게 접속되도록 한 섬세함이 돋보이고, 건축 공간의 층높이를 달리하여 천창의 빛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관찰된다. 층높이가 다른 겹공간 사이로 하늘을 끌어오려는 방식은 장충체육회 화장실에서도 사용되었고, 석호정에서는 보다 적극 풍경을 취하는 개방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남산 83 화장실 앞 쉼터에서 바라본 풍경

 


한남자락과 장충자락에 걸쳐 있는 작은 ‘쉼표’들을 탐방하면서, “공중 화장실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남녀노소 모두가 이용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공건물이며 어떤 공공건축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 이 건축가의 말에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상상어린이공원 화장실, 비석골공원 화장실 등 20여 개소가 넘는 화장실을 설계해온 그의 행보를 보면 일생에 걸쳐 700여 개소의 어린이놀이터를 디자인한 네덜란드 건축가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가 떠오른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건축가와 건축이 시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건축가가 일상의 공공공간을 문화적 자산으로서 오래도록 가꾸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들 작은 건축, 동네 건축에서의 희망이 이토록 소중한 것이다.  


서울의 앞산, ‘남산’에 들어선 일상적 공공공간을 찾는 이 여정의 끝은 남산 예장자락이다. 석호정에서 북쪽 순환로를 따라가다 필동으로 빠져 북으로 올라가면 예전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에 문을 연 남산 한옥마을이 다른 세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 또 한 켜의 다른 세상이 있으니, 바로 2007년 개장한 남산국악당이다. 지상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ㅁ’형식의 전통건축공간만이 조붓하게 드러나 보이는 터라 330석 규모의 커다란 공연장의 존재를 가늠키 힘들다. 철근콘크리트 및 철골조 공연장이 지하에 있는 반면, 아담한 크기의 교육 및 지원공간이 어우러진 지상부는 전통 한식 목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건물은 자연스럽게 마을 한옥과 어울리고, 방문객을 친숙하고 따듯한 느낌으로 감싸 안는다.

 

[서울 남산국악당] 전경, 김용미, 2007

 

화계 형식으로 설계된 지하 선큰 마당

 


남산국악당의 건축가 김용미 선생은 “한옥으로 둘러싸인 마당에서 공연을 보는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프로시니엄에 전통 팔각형태의 돌출무대를 복합한 무대형식과 나무격자 천정과 창살문 벽이 둘러싼 공간은 이런 바람에 부합하는 듯싶다. 공연장 내부의 무대 마당은 지하 공간에 햇살을 끌어들이는 선큰 마당과 대구를 이루며 겹겹이 다른 켜들이 중첩되는 깊이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장자락에 위치한 남산국악당을 뒤로하고 귀가하는 길에 인근 충무로역 ‘오재미동’에 잠깐 들렀다. 오재미동은 이전에 활력연구소로 불리던 곳으로 지하철역 자투리 공간을 이용해서 길이 70m 90여 평 규모의 공공 문화공간을 마련해 운영하는 곳이다. 운영진이 바뀐 후 예전만큼의 ‘활력’을 찾아볼 순 없었지만 삭막한 도심 생활 속에서 활력을 찾는 장소는 분명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적 공간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무로역 오재미동 내부 모습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컨텐츠를 찾아볼 수 있다. 

 


남산에서 찾은 이러한 일상적인 공간들 덕분에 오늘의 남산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백 년 훼손의 슬픔을 딛고, 일상 속 활력의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 아닌가 싶다. 혹자는 예부터 남산이 ‘올라가 노는 산’이 아니라 ‘바라보는 산’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수많은 기념과 상징에 목마른 과시형 건축물과 조형물로 몸살을 앓아왔던 것이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자연과 더불어 일상이 둥지를 트는 ‘활력’과 ‘즐거움’의 공간, 죽음의 기념 대신에 삶의 기억으로 일상을 보듬어 가는 공간, 굳이 날을 잡아 행사를 치르지 않더라도 짬나면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올라가 쉴 수 있는 동네 ‘앞산’ 같은 공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연과 사람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배경 같은 공간으로 ‘남산’을 가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 이 여정의 끝, 빠르게 움직이는 지하철 한쪽에서 그려본 유쾌한 일상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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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승수
(주)디자인그룹 오즈 건축사사무소 소장. 서울대 건축학과와 석사, Berlage Institute를 졸업한 후, 공공성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서울대)를 받았다. (주)디자인그룹 오즈를 운영하면서 성균관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공성에 바탕을 둔 도시공간 조직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제1회 젊은건축가상(2008),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10),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2010)의 참여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저서로는 《공존의 방식》(시공문화사, 2013), 《공공을 그리다》(시공문화사, 2012) 등이 있다.

 

 

일러스트: 박정은 (http://www.jung-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