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작은 목소리들의 합창과 대화
현시원
2013-05-10

 

 

앞이 보이지 않으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대성당>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이가 등장한다. 소설 마지막 부분, 앞이 보이는 이와 보이지 않는 이가 처음 만난 날인데도 서로의 손을 맞잡고 그림을 그린다. 거창한 그림은 아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대성당에 관한 설명을 듣던 맹인이 ‘대체 어떻게 생겼나요?’라고 묻자 종이에 대성당의 형태를 같이 그리며 함께 볼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서울에 5년째 사는 나의 덴마크인 친구는 매주 목요일이면 시각장애인과 등산을 한다. 뒤에서 친구의 가방을 붙잡고 걷는 맹인은 시력으로 눈앞을 볼 수는 없지만, 산을 오르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적당한 완력으로 언덕을 지나고 간단하게 길을 안내해주면 대화를 나누며 좁은 산길을 오를 수 있다. 이런 짧은 교감의 순간을 ‘소통’이라는 뭉뚝한 말로 바꿔 부를 수는 없지만, 교감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던 것을 하나씩 변화시킨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마음의 벽화

 

때로 공공미술은 어딘가 조금씩 보이지 않는다. 우화나 감동 어린 실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간의 결을 바꾸며, 세상을 보는 기존의 방식을 재고하려는 작품들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벽화가 존재한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유독 지팡이를 이용해 걷는 이들과 자주 마주친다. 왼편의 인왕산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서울맹학교가 있다. 이곳은 1913년에 개교한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학교다. 서울맹학교의 담벼락은 학교 내부와 밖을 경계 짓거나 가로막지 않는다.

        담벼락은 작은 손 모양이 찍힌 도자 벽화로 채워져 있다. 배영환 작가는 2008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로 서울맹학교 학생과 함께 벽화 작품 <점자-만지는 글, 아름다운 기억>을 완성했다. 작가는 앞이 보이지 않는 학생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손으로 대상을 ‘만질 수 있는’ 점자 벽화를 완성했다. 벽화는 학생이 작품을 만질 수 있도록 학생의 키와 길의 경사도에 따라 계단형태로 배치되었다. 키가 크지 않은 아이도 그리 높지 않은 벽화를 만질 수 있다. 이 벽화는 손을 잠시 대어보고 다시 또 봐야 한다. 멀리서 봐도 단번에 알아보기 쉬운 거대한 공공미술과는 말 거는 방식이 애초부터 다르다. 양각으로 찍힌 학생들의 손에 내 손을 포개면 짜릿한 촉감이 느껴진다.

 

배영환, [점자-만지는 글, 아름다운 기억], 2008~2009

 

<점자-만지는 글, 아름다운 기억> 벽화엔 학생들의 손짓과 생각 그리고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 담겼다. 벽화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180여 명의 맹학교 학생이 직접 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학생들은 자기 손 모양을 양각으로 새긴 도자 옆에 손으로 쓴 자신의 소망을 하나하나 적었다. 작은 크기의 글자는 가까이 다가가 봐야만 읽힌다. 초등학교 3학년 채석모 학생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다만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뿐이다”고 썼다. 이밖에도 중학교 3학년 김인의 학생은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소중한 나의 손”, 중학교 1학년 송재선 학생은 “대통령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힘써 주세요”라는 문장을 남겼다. 작가와 함께 벽화 작품에 참여한 학생들의 글을 만지며 학교 담벼락 길을 따라 걷는다.
        배영환 작가는 가로세로 21cm의 작은 사각형 패널 수백 개에 ‘만지는 글’과 학생들의 바람을 담아내기 위해 몇 개월 동안 맹학교 학생과 핸드프린팅, 글쓰기 과정을 진행했다. 초벌, 시유, 재벌, 점자 입체 전사, 삼벌 등의 양각도자 만들기 과정도 ‘함께’ 했다. 작가는 “학생들 모두 다 감각에 굉장히 특출나다. 일반인이 못 느끼는 것, 모르는 것을 그들은 느끼고 알고 있다. 내게는 그들 모두의 그림 하나하나가 다 특별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이 눈으로 길을 볼 때 난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는 한 학생의 말을 들을 기회를 내게 선물한 장소는 바로 이 ‘말하는 벽화’다.

 

배영환, [수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2007

 

서울맹학교 바로 옆의 서울농학교 건물 담벼락에도 배영환 작가와 학생들이 나눈 대화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서울맹학교 벽화를 제작하기 1년 전 작가는 농학교 학생과 <수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2007)을 공동 제작했다. <수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그 ‘아름다운 말(수화)’을 둘러싼 다양한 이미지와 방식을 ‘들려준다’. 다섯 개의 패널로 구성된 벽화에는 수화의 한글 자음과 모음, 숫자, 알파벳의 한국 표준 디자인과 학생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아기자기한 그림과 함께 새겨있다. 벽화는 성대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몸짓으로 나오는 ‘수화’가 어떤 말인지 소개한다. 더불어 그 자체로 이들이 나누는 대화다. 이렇게 벽화는 세상에 하나뿐인 대화 모음집이 된다. 담벼락에 붙은 거리의 벽화는 그 어떤 귀한 미술관에 걸린 그림보다 생생하게 이들의 마음을 기억한다. 농학교 학생이 새겨 기록한 벽화 위의 말들(words)은 시끌벅적한 세상의 어떤 말보다 고요하다.

 

사라진 돈의문, 거리로 스며들다!

 

서울맹학교가 있는 경복궁역 근처에서 광화문역까지는 압도적인 기념비가 곳곳에 존재하는 서울의 상징적인 장소다. 광화문광장을 나누어 쓰는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클래스 올덴버그의 청계천 상징 조형물 <스프링>까지 한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공공미술은 자신을 드러내고 기념하기 바쁘다. 터 잡은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을 잊지 말라는 듯 거리에 선 공공미술 작품은 강력한 이미지로 말을 건넨다.

 

김세중, [이순신 동상], 1968 / 김영원, [세종대왕 동상], 2009

 

그런데 광화문사거리를 지나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에 가면 눈에 보이는 공공미술과는 다른 작업이 하나 있다. 안규철 작가의 <보이지 않는 문(Invisible Monument)>이다. 배영환 작가의 두 작품처럼 이 작품도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로 2007년 완성됐다. 우리는 거리를 걸으며 이 작품을 만날 수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작품은 자신의 이름인 ‘보이지 않는 문’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어, 눈에 띄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작품 앞을 그냥 스처가는 이들이 대다수다. <보이지 않는 문>은 도대체 어떤 ‘문’을 말하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문은 어떻게 보며, 보일 수 있을까?…. 거리의 거대한 공공미술과는 전제 조건이 다른 이 작품은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안규철, [보이지 않는 문], 2007


안규철 작가는 돈의문 터를 기억하기 위해 작품의 대화 상대로 ‘문’을 삼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과거의 문(돈의문)을 거리에 다시 불러오기 위해 작가는 조심스럽게 길을 열어놓고, 생각의 장소를 마련했다. 지금은 옛 사진으로만 남은 돈의문은 1422년 세종 4년에 세워진 사대문이다. 1915년 돈의문은 서울 도로를 넓히겠다는 일제의 계획에 따라 흔적도 없이 몇백 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이곳은 500년 동안 여러 사람이 통과했던 엄연한 ‘문’이었다.

        작가는 사라진 문을 기억하는 작은 표지석만 있던 이곳에 거리에 스며드는 기념비를 제작했다. 미세하고 잠잠하게, ‘사라진’ 문의 현재 상황을 은유하듯 말이다. <보이지 않는 문>은 거리 속으로 들어가 있다. 사라진 돈의문을 기억하는 작품으로 완성된 ‘보이지 않는 기념비’라 할 수 있는 작품은 언뜻 보면 나무로 된 담벼락처럼 보인다. 이곳은 보행자에게 안정감 있는 계단 도로로 이용된다. 작가의 <보이지 않는 문>은 돈의문 터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공간과 정보를 담은 간소한 설명판을 갖췄다. 가로 23.8m에 달하는 벽은 성벽의 단면을 떠올리게 하고, 도로에서 보이는 벽면에는 LED 조명이 달려있어 밤이 되면 사라진 돈의문 터를 밝히는 작은 불빛이 반짝인다.

        <보이지 않은 문>은 마치 흰 종이 위의 지우개처럼 꼿꼿한 기념비를 세우지 않고 주변 공간에 스며들도록 한다. 아무도 과거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곳에서 안규철 작가는 ‘기억하기’를 주장하기보다, 기억의 벽과 공간을 만들어 과거를 다시 상상하는 플랫폼으로 만들었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물도 없고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낸 기념비적인 문장도 없다. <보이지 않는 문>은 강북삼성병원 앞에 이어지는 혼잡한 도시 한복판을 걸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의의의 문이다. 작가는 이를 “기념비 없는 기념비”라고 일컬으며 “사라진 돈의문을 생각하게 하는 기억의 공간”이라는 성격을 부여한다. 차량통행이 밀집된 거리 한복판에 시선을 사로잡는 새로운 조형물을 하나 새로 세우는 대신, <보이지 않는 문>을 통과하는 보행자에게 지나간 역사란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진동처럼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안규철, [보이지 않는 문], 2007


돈의문 터를 기억하는 <보이지 않는 문>은 안규철이 몇 해 전 적은 인상적인 문장과 닮았다. 그는 《씨네 21》(2005.1.4., No. 485)에 발표한 <지우개>라는 글에서 “연필이 한 일, 특히 그것이 잘못했던 일을 지워서 없던 일로 돌려놓고는 종이 밖으로 사라져줄 뿐, 지우개는 한 번도 저 스스로 무엇을 말하는 법이 없다. 종이 밖으로 추방당하게 된 연필가루와 뒤섞여 더럽혀지고 산산이 부서진 가루가 되어 저쪽 세상으로 깨끗이 떠나주는 것이 그의 소명이다”고 적었다. 거리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높고 크게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사라진 것들, 잘 보이지 않던 이들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점자-만지는 글, 아름다운 기억>(서울맹학교), <수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서울농학교)과 돈의문 터의 <보이지 않는 문>은 모두 멀리서 보면 절대 제 모습을 온전히 보여 주지 않는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작은 목소리들의 합창이자 사라진 것을 다시 불러내는 기억의 힘으로 두 작품은 보이지 않던 주변을 밝힌다. 그 불빛이 아주 환하지 않아서 좋다. 너무 환하면 잡아내지 못 하는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의 사물과 사람들에 관해, 이러한 공공미술 작품은 최소한의 대화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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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현시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를 졸업했으며 독립 큐레이터로 전시를 기획한다. 《디자인 극과극》(학고재, 2010)을 썼고 《한겨레 21》 등의 매체에 글을 기고한다. <라이팅밴드(writingband.org)>, <잭슨홍 개인전>(2012), <지휘부여 각성하라>(2010) 등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사진: 권현정

 

일러스트: 박정은 (http://www.jung-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