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미술
박성진
2013-05-09

 

 

휴대폰도 호출기도 없던 막막한 시절, 길 위에서는 오로지 아득한 기다림이 전부이던 그때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초등학생인 누이와 예고도 없이 버스정류장에서 퇴근길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삐딱하게 서 있는 정류장 표지판을 앞에 두고 앉아, 곧 만날지도 모를 아버지에게 무슨 과자를 사달라고 할지 누이와 이야기하며 바쁘게 오가는 버스를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번호의 버스가 들어올 때면 두 눈을 부릅뜨고 쏟아져 내리는 승객 사이로 나와 닮은 얼굴을 찾느라 온 신경을 기울였고, 설령 아버지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다. 떠나는 버스 뒤로 우리의 기다림은 점점 농익어갔다. 잠시 멈췄다 출발하는 버스에 기댄 그 기다림은 지루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서정윤 시인의 시구처럼 말이다.


버스정류장, 메마른 도시에 감성을 전하다


여정 속 만남과 헤어짐, 떠남과 도착 그리고 기다림…. 버스정류장은 종종 우리 삶을 빗댄 환유적 공간으로 문학 속에 등장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오싱젠은 잃어버린 삶에 관한 향수와 상실의 고통을 희곡집 《버스정류장》에 담았고, 이미연 감독은 상처를 간직한 열일곱 소녀와 서른두 살 남자의 사랑을 영화 <버스, 정류장>으로 표현했다. 이런 문학적 차용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실생활에서 버스정류장은 또 어떠한가? 대중교통체계의 핵심적인 노드로 작용하며 대중의 응집과 분산, 소통과 흐름을 야기하는 기능을 가진다. 강도와 방향성이 서로 다른 대중의 엄청난 운동에너지가 바로 이 공간으로 수렴되고 확산하면서 도시의 역동성이 발휘된다. 결국 버스정류장은 도시 구조와 기능의 차원을 넘어 소시민의 낱낱한 삶 속에 자리 잡은 감성적 기능공간이다. 이곳에 혼존하는 집단과 개인의 기억이 이종의 운동에너지와 융합해 미술의 형식으로 표현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버스정류장만큼 공공미술이 어울리는 장소도 찾기 어렵다.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부터 꾸준히 아트쉘터가 세워지는 데는 이런 기능적, 심미적 타당성이 존재한다.

        일시적 피난처를 뜻하는 ‘쉘터(shelter)’라는 말이 일러주듯, 보통 버스정류장은 최소한의 건축요소인 기둥, 벽, 지붕으로 구성된다. 비를 피할 지붕과 바람을 막을 벽, 그리고 여기에 버스노선정보, 벤치, 휴지통, 광고판, 조명 등이 더해져 구색이 갖춰진다. 그러니 사실 버스정류장이라는 공간이 크게 다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아트쉘터’에 참여한 7명의 작가는 주변의 도시적 맥락과 장소의 특성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위와 같은 전통적인 구성요소를 해체 혹은 대체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미적 공간을 만들어 냈다. 


거리의 흐름과 속도를 형상화하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출발한 새문안길이 서대문을 향해 유유히 굽어지는 변곡점에는 최욱의 <서울역사박물관 아트쉘터>(2007)와 하태석의 (2007)가 있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곳 모두 건축가의 작품으로, 도시와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들은 인도와 차도라는 상호불가침의 영역에 나타나는 속도의 차이를 상쇄시키며 둘 간의 접속을 시도하고, 주변 풍경을 경험론적으로 세밀하게 분절한다. 인도와 차도가 서로 어떻게 배려해야 소통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등진 최욱의 <서울역사박물관 아트쉘터>는 상대적으로 짊어져야 할 무형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이 같은 무게와 압력에 정면으로 맞서다가는 자칫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최욱의 아트쉘터는 몸을 벌려 그 압력에 대항하기보다는 흘려 보내고, 그 무게를 지탱하기보다는 분산시킴으로써 서로 다른 시간적, 공간적 위계 간의 소통을 가능케 한다. 상황이 복잡할수록 해법은 간단해야함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지면에 세워진 철제 각 파이프의 일정한 간격 사이로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실제로 버스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파이프 사이를 이리저리 넘나들며 즐겁게 공간에 빠져들었고, 일부는 요란스런 도로에서 시선을 거두어 파이프 사이로 들어오는 고요한 경희궁역과 수목을 응시했다. 최고높이 4m, 길이 16m에 이르는 이 큰 구조물은 가로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주변의 풍경을 막거나 가리지 않는다.

 

최욱, [버스정류장 아트쉘터(art bus shelter)], 2007

 

반대로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설치한 하태석의 는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서 흘러가는 차량과 사람의 움직임을 기울여진 10개의 스틸 루프로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로의 만곡부를 빠져나가는 차량과 보행자의 속도가 제각각인 것처럼 스틸 루프의 기울기와 모양, 길이도 모두 다르다. 최욱의 작품이 만곡의 바깥쪽에서 두 영역의 소통과 상호관입(inter coursing)을 느슨한 병렬구조로 조율하고 있다면, 하태석의 작품은 만곡의 안쪽에서 프레임의 중첩구조로 비교적 분명한 사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최욱은 속도의 경험을, 하태석은 속도의 형상화를 중요시한 결과이다.


하태석, [플로우(Flow)], 2007


남산 소월길 남산도서관 앞에 있는 최순용의 <회화적 몽타주>(2011) 또한 건축가의 작품으로, 앞선 두 작품의 특징적 요소가 한곳에 적절히 버무려진 모습이다. 가장 큰 차이는 도시와 자연이 서로 만나는 남산에서 서로 다른 두 시간의 풍경을 몽타주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했다는 점. 이렇듯 건축가의 아트쉘터는 박스라는 기본 틀 속에서 시각적 프레임으로 풍경을 구축한 뒤, 속도라는 요소의 개입으로 변화와 흐름을 이끌어낸다. 장식과 조각이 건축의 표면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모더니즘의 추상성이 현대건축을 지배한 이후, 오늘날의 건축가는 자연이나 사물을 직접 차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멀리해왔다. 이미 그들은 그런 감각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뒤이어 등장하는 텔레비전과 개구리, 버섯과 잎사귀 모양의 아트쉘터는 그들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최순용, [회화적 몽타주], 2011
 

익살과 위트의 풍경 속에서 기다리는 버스


완만히 흘러내려 온 남산의 남사면이 도심과 만나 경계를 이루는 3.7㎞의 소월길은 감히 대표적 민족시인 호(號)를 거리낌 없이 따올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도 서정적이다. 도심과 남산을 가르는 경계선이기에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서울의 풍경과 흩날리는 남산의 벚꽃을 동시에 곁에 두고 걸을 수 있는 매력 만점의 길이다. 그러니 이곳의 아트쉘터는 버스정류장인 동시에 야외 조각상이며, 산책 중에 잠시 앉아 호흡을 고를 수 있는 휴게소이다. 이런 장소의 특성 때문인지 작가 대부분이 자연과 주변 사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품을 제안했다. 앞서 도심에서 건축가인 작가가 현상과 추상에 몰입했다면, <회화적 몽타주>를 제외한 소월길의 네 작품은 모두 미술가의 것으로, 그들은 한결 편안하게 우리에게 익숙한 구체적 이미지와 형상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아날로그 흑백텔레비전을 그대로 가져온 김재영의 <휴식>(2011)은 정말 누가 봐도 그 의도를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친절하고 공감이 가는 작품이다. 공공미술은 갤러리나 미술관 안의 미술보다 좀 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를 전제로 하기에 개념과 소재의 보편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길에서조차 현대미술 난독증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텔레비전이라는 일상적 사물과 매체를 과장된 스케일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행인에게 재미를 안기고, 기능적으로는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한다. 보성여중?고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이 궁금할 것이다. 실제로 버스를 기다리던 한 여성은 “텔레비전이라는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이렇게 버스정류장으로 등장하니 위트가 있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아트쉘터의 체험 포인트는 안이 아니라 밖, 즉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아트쉘터의 전경이기에 혼자로서는 진 맛을 느끼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김재영, [휴식], 2011

 

이에 반해 후암약수터 버스정류장인 주동진의 <남산의 생태>(2011)는 기존 정류장의 형식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최소한은 개입으로 익살스러움을 전해준다. 후암약수터에서 토종개구리가 발견된 것에 착안해 익살스러운 개구리를 벤치와 지붕 위에 배치했다. 또 정류장의 지붕에 해당하는 연잎의 형상은 색유리로 처리해 자연의 빛에 따라 달라지는 조명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소월의 시적 서정성을 낙하하는 낙엽의 비행곡선으로 조형화한 스카타고&김현근의 <쉼표, 또 다른 여정>(2011)은 버스정류장으로서 명확한 기능적 한계를 가짐에도 하나의 조형물로 주변을 환기한다.   


주동진, [남산의 생태], 2011


스카타고&김현근, [쉼표, 또다른 여정], 2011


버스정류장의 오래된 미래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서울역 환승센터에 지어진 현대카드의 아트쉘터는 버스중앙차선제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미디어아트와 접목된 아트쉘터의 가능성을 한껏 보여 준다. 환승센터 내 12개의 승차장의 투명한 유리에 LED를 삽입한 미디어 패널을 배치해 화려하고 역동적인 밤 풍경을 창출했다. 게다가 이 미디어 패널은 시민의 움직임을 감지해 영상으로 반응하고, 초음파 센서로 버스의 도착을 감지할 수 있는 등 다양한 인터렉티브 요소를 갖추었다. 특히 맞은편 서울스퀘어빌딩의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면서 블랙홀과 같았던 도시의 어둠을 공공미술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채정우, [서울역 아트쉘터], 2009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트쉘터는 기능과 아름다움을 오가며 새로운 환경과 장소에 맞게 진화하고 있다. 정보나 웃음을 제공하며 때론 추상적 풍경과 현상을 담기도 한다. 혁신적 기술로 새로운 공간의 형식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해석과 표현의 이면에는 멈춤과 기다림의 철학이 숨어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돌아온 길을 반추하고, 또 한 번 새로운 버스에 오를 힘을 얻는다. 한 연구논문에서는 스마트폰의 지리정보 보편화로 버스정류장이 사라질 것이라 예측하지만, 그래도 그 공간의 상징성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딸아이가 퇴근길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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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성진 <건축저널리스트 / 《공간(SPACE)》 편집팀장>

국민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공과대학에서 줄곧 건축역사이론을 공부했다. 현재 건축저널리스트로서 《공간(SPACE)》의 편집팀장을 맡고 있으며, (특)문화유산국민신탁과 희망제작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저서로 《언젠가 한 번쯤, 스페인》(시드페이퍼, 2012)과 《모던스케이프》(이레출판, 2009), 공저서로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효형출판, 2009)이 있다.

 

일러스트: 박정은 (http://www.jung-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