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지속가능한 한시적 공공조형물의 도입 가능성을 기대하며 - 영국의 공공미술 전략을 바라보면서
안성희
2011-06-17


“이거, 유지 보수에는 문제가 없겠죠?” 작품의 기획안을 내밀었을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다. 이 순간 즐겁게 구상하며 솟아나던 많은 조형물의 이야기들은 한꺼번에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해 보지 않은 예술가는 거의 없지 않을까?

대부분 건축물의 외부 공공장소에 자리하는 소위 말하는 조형물들이 가진 숙명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빌딩 숲에서 더 길게, 더 튼튼하게, 살아 남아서 폐허가 된 도시 속에서도 파르테논신전의 기둥이나 앙코르와트의 조각상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도록 해야 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조형물에게 ‘아름다움’(조형성) 이라는 걸 덧붙여서 동시에 만족시키기를 원한다. 과연 조형물에 있어서 ‘여러 다양한 의미의 아름다움’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우리는 심적(心的)으로 도시의 도로나 건축물과 같은 것을 예술작품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모순되게도 자본주의적 경제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들인 재화만큼 오래 가 주어야 한다는 통념을 그대로 적용시키려 하고 있다.


벌써 오래 전이긴 하지만 1995년 유럽에서 열린 공공미술 컨퍼런스에서는 각 나라의 유지보수 실패 사례들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분수를 놓는 바람에 계속 얼어서 결국 철수시킨 추운 나라 스웨덴의 실패(?) 사례, 실험적으로 유리를 재료로 도입해서 작업을 하고 매번 깨지는 바람에 예산이 계속 들어가는 영국의 한 지방도시의 사례 등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면서도 문제점들을 덮지 않고 꺼내 놓는 매우 인상적인 학술대회였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이러한 유지보수의 어려움이 대두되는 가장 큰 이유로 예술작품의 시대적인 성향이 재료 등 표현 방법론에 따라 변하고 있으며, 시민들의 기대치나 참여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회적 변화를 들고 있다. 사실 공공장소에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는 공공 조형물을 지원해온 건 특정 국가지원 프로젝트들을 제외하고는 ‘1퍼센트 법’이라 불리우는 강제적 투자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된지는 이미 반세기가 넘었다. 1964년 ‘시민을 위한 1퍼센트’(The One Percent to the People) 법이 캐나다에서 실행되고 그 후 13년간 104개의 크고 작은 지역에서 예술작품이 개발자본의 힘을 얻어 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유럽의 경우, 네델란드에서는 신축하는 공공건물에 한해서, 그리고 핀랜드에서는 암묵적으로 거의 모든 건물에 대해 소위 ‘1퍼센트 법’을 적용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최대 2퍼센트까지도 적용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21개 주에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 보다도 공공장소에 예술작품이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최근 공공미술을 통해 도시나 지역을 재생하는 프로젝트에 앞장서온 영국에는 이 퍼센트 법이 없다. 이런 강제적인 법 조항이 없어도 환경적 중요도와 주민들의 삶의 질을 고려할 때 예술작품이 공공공간이나 생활공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러한 자율 속에는 어마어마하게 치밀하게 계산된 여러 경우의 수들을 위한 전략과 단계별 계획 그리고 협력이 창의적인 프로젝트들을 받쳐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진보적인 행로는 그 동안 수없이 치루었던 시행착오들을 통한 대가임이 분명하며 한순간에 우연히 찾아낸 수맥은 아님이 분명하다.


런던의 경우 도시의 작은 구역의 재개발들이 주로 민간자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주민과 방문객 혹은 사무실 이용자들을 위한 스퀘어(작은 광장)를 중심으로 하는 공공 장소와 그곳의 공공미술이 빠지지 않는다. 때로는 그곳의 예술작품 때문에 그 장소가 알려지기도 한다. 최근에 매우 큰 규모의 도심재개발이 이루어진 오랜 역사의 스피탈필드 시장 구역은 커다란 조형물을 세우는 대신 재개발로 소외된 주민들과 새로 이사온 주민들의 융합을 위한 여러 음악과 미술 프로젝트와 프로그램들을 몇 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의 작은 음악공연과 퇴근 후 회사원들이 함께 길거리에서 함께 춤을 추는 이벤트와 같은 치유 프로그램, 학생들을 위한 크고 작은 공모전, 외부와 연계한 전시 프로젝트 등 끊임없이 예술과 일상을 이어주는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런던의 사우스뱅크와 로열아카데미 앞 광장 그리고 해마다 다른 건축가가 카페를 지어 개장하는 하이드파크의 서펜타인갤러리 앞 등 이미 몇몇 곳은 해가 바뀌고 여름이 올 때마다 새로운 공공예술작품들을 만나는 기대감을 주는 대표적인 장소들로 유명하다.


앞서 언급한 영국의 사례와 같은 한시적 공공조형물이나 프로그램 위주의 공공미술에는 기본기획수립을 위한 조사와 연구에 많은 투자와 신중함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유지보수를 위한 전략보다는 창의적인 기획과 지속가능한 한시적 공공미술과의 제휴를 통해 생기가 넘치는 도시공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공공적인 사고의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있다고 본다. 공공장소의 조형물들은 결국 그곳의 주민과 방문객, 즉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방법들이 바람직하며 미래적인 것인지를 찾아보는 것이 바로 정책연구가들에 주어진 숙제인 것이다. 예술작품은 항상 우리 심장의 두근거림에 힘입어 사람들이 한계라 생각하는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믿기에 방문할 때 마다 달라지는 조형물들을 보는 재미와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예술작품을 간직하게 해 주는 장소도 서울이라는 도시에 한 두 곳은 있음씩 하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자료제공: 아르코 웹진 1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