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미술장식, 공공미술에 대한 오해와 이해
윤태건
2004-08-02
미술장식, 공공미술에 대한 오해와 이해
-중개기구의 실태조사 및 역할
윤태건 - 카이스갤러리 디렉터


폭주하는 열차에 브레이크를
문화관광부에서 주최한 공청회를 정점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공공미술제도 도입에 대한 논란이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하지만 제도 개선을 둘러싸고 찬반양론으로 크게 갈라진 상태에서 각각의 단체들은 자체적인 연구용역 의뢰나 심포지엄 준비, 공공미술과 관련한 단체 구성 등 물밑에서 각개약진하고 있다. 어쩌면 2차 공청회가 상정될 때를 맞춰 다시 한 번 논란의 불씨를 되살리고, 논쟁의 칼을 벼리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공청회 개최 여부를 둘러싸고, 그리고 공청회 당시에 있었던 소란은 공공미술제도 도입에 따른 합리적이고 진지한 토론과 미술계 구성원들 간의 공론화 과정을 제대로 갖기도 전에 극단적인 반발과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였다는 것은 익히 하는 사실이다.
그간 미술장식품제도의 시행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왔던 제도 개선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제도라는 보다 폭넓은 제도의 도입은 취지에 대한 상세한 검토와 올바른 평가 없이 밥그릇 싸움, 편가르기 싸움으로 변질되어 미술계 내부에서 소모적, 감성적 불협화음을 쏟아 냈다. 한편에서는 공공미술제도 자체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이념논쟁으로 끌고 가거나 무조건적인 반대로 일관한다는 듯 한 인상을 주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적인 조건을 무시한 채 그리고 제도 도입의 본래 취지는 뒤로 한 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센터의 설립과 역시 막대한 기금의 조성을 주된 목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2003년 기준으로 500억 가까이 되는 공공미술시장의 기득권을 놓고 벌이는 진흙탕 싸움으로 비쳐지고 있어 무척이나 가슴 아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비판과 조소 섞인 평가는, 그래서 일방적인 주장을 되풀이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에서 조금은 되돌아보고 반대 입장의 주장에 귀기우려들을 필요성을 느끼해 주는 또 다른 질책인지도 모르겠다.
마주보고 달리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열차처럼 마냥 폭주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머리를 맞대고 기존 제도의 폐해와 문제점을 고치고 새로운 제도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도입을 위해 미술계 구성원들의 합의를 도출해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제도 도입을 둘러싼 찬반양론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된 의견 수렴의 실마리가 엿보며 이 같은 희망은 순진한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공공미술제도, 미술장식제도를 품에 안아야
우선 공공미술제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미술장식제도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공공미술제도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으나 실상 화랑협회나 미협이 %조정을 통한 옵션제, 센터 설립과 관련해 강한 반대 의사를 피력하는 과정에서 ‘공공’자만 나와도 색안경을 끼고 질겁하는 형국이라 그렇게 느껴졌을 뿐, 공공미술 자체를 반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사실 미술장식이라는 용어는 어이없게도 최초 제도가 시행될 때 정책과 법안을 입안한 담당자가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만약 그 당시 건축물미술장식제도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건축물공공미술제도라고 명명했었다면 어땠을까? 즉 현재 제도의 폐해가 ‘미술장식’이어서 발생한 거도, 반대로 새 예술정책에 나온 거처럼 문예진흥법에서 ‘미술장식’이라는 용어를 ‘공공미술’로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 같은 오해는 어쩌면 문화정책개발원에서 나온 공공미술관련 정책연구서에서 공공미술의 발전단계를 건축 속의 미술(Art in Architecture)-공공미술 속의 미술(Art in Public Places)-도시계획 속의 미술(Art in Urban Design)-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도식적인 틀로 제단화 했던 것에 일정부분 기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변화과정은 엄밀히 말해 발전이라기보다는 확장의 의미이다. 현재의 공공미술의 개념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만이 건축 속의 미술도 역시 포함하는 것이다. 공공미술의 낮은 단계(건축 속의 미술 등)을 상정하고 높은 단계(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 등)로의 발전이라는 논리에 집착하게 되면 당연히 이전의 모뉴멘탈한 형태의 작품들은 공공미술에 반하는 작품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 같은 사고는 미술장식품과 공공미술품을 대치되는 개념, 미술장식품에 비해 공공미술품이 우월하다는 모더니즘적 오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을 위해서 기존의 오브제 작품을 싸잡아 폄하하거나 혹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 전체 공공미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야만 마치 공공미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는 판단은 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심각한 자기모순이자 또 다른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공공미술제도, 공공미술센터의 ‘공공’자만 나와도 질겁하고 있는 형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술장식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마치 미술장식품과 공공미술품을 대치되는 개념으로 상정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무조건적인 반대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조금만 경계심을 풀고 공공미술제도에 대한 이해를 갖는다면, 그리고 또 다른 편에서는 막대한 기금의 조성과 권력화 된 센터늬 설립이라는 목적의 경직성을 풀고 공공미술제도 도입에 대핸 유연한 입장을 취한다면 합의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을 보인다.

게임의 후폭풍-기금 우선이냐. 시장 우선이냐
공공미술제도의 시행을 이처럼 미궁에 빠지게 한 가장 큰 원인은 아마 %와 관련한 일부의 ‘숫자게임’ 덕분이다. 새 예술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문화관광부 공청회에서 발제된 고백처럼 ‘기금제’다. 어쩌면 기존처럼 0.7%로 건축주가 직접 설치하거나 0.5%로 기금을 납부하고 제도를 이행하는 것 중 택일하는 옵션제가 제시된 것도 바로 이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며, 기금이 조성되어야만 기금을 운용할 수 있는 기구, 즉 공공미술센터의 설립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우선 %조정을 통한 옵션제가 실효성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상당한 논란에 휩싸여 있다. 최초 새 예술정책에서 제시된 시안에서는 0.7%로 건축주가 직겁 설치하거나 0.5%로 기금을 납부하고 조성된 기금은 공공미술센터에서 사용하는 방식은 거의 실효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0.7%와 0.5% 간의 차액인 0.2%, 즉 100%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약30%에 해당하는 금액이 자동적으로 리베이트로 고착화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것은 삼성, 현대, 대우를 비롯해서 10여개 대기업 건설회사와 개인 건축주 등 필자가 관련 업무를 진행해 본 20여 곳의 건축주 및 담당자에게 직접 면담, 조사한 결과다. 더 큰 문제는 리베이트 등 불법적인 행위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그나마 지속적으로 감소해가는 리베이트 관행이 오히려 다시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새 예술정책이 발표된 후 이 같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반발이 커지자 또 한 번의 % 게임이 시도된다. 아주 약간의 문구 차이지만 공청회 때 발제된 내용에 따르면 0.7%로 건축주가 직접 설치하거나 0.5%로 기금을 납부하되 건축주가 요구하는 장소를 우선순위로 두었을 때는 반대로 엄청난 규모가 기금으로 모이게 된다. 역시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약60%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되며 나머지 대부분은 자동적으로 30%이상으로 리베이트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결국 전체 공공미술시장의 규모가 0.7%에서 0.5%로 자동적으로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약간의 문구 차이(납부된 기금을 임의로 쓰느냐, 건축주가 요구하는 장소에 쓰느냐)에 따라 기금 조성에 있어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기금 조성을 위한%로 조정을 통한 옵션제의 도입은 오히려 공공미술제도 도입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의 리베이트 등 불법, 탈법적 행위를 조장하는 뜻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미술시장의 생리, 미술장식품제도의 문제점만 지적했지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오로지 기금 조성을 위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려는 것이었을까?
결국 화랑협회와 미협을 중심으로 제도에 대한 강력한 반발로 한발 후퇴해서 최종적으로 나온 새 예술정책에서는 구체적인 %문제는 빠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 기금 조성에 대한 문구는 남겨둠으로써 불씨를 살려 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든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는 입장과 시장 축소는 절대 ks 된다는 입장, 나아가 기금 조성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기금을 조성해서 공고미술제도가 갖고 있는 본래의 취지(과정으로서의 공공미술, 주민참여형 공공미술, 시민교육 미술프로그램 도입 등)에 맞게 사용하겠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간다. 또한 건물 앞에 오브제를 세우는 협소한 미술장식의 개념에서 새로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 등 보다 넓고 발전적인 개념도 포괄할 수 있는 방향으로서의 공공미술제도가 정착하는데 기금이 사용되는 것도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를 막대한 기금을 조성해서 센터에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과연 더 좋을까? 시장의 축소와 다수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해야만 하는 것일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작지만 일부 조성된 기금으로 모범과 전형을 만들고 민간에서 경쟁체제로 보다 다양성을 갖고 따라오게 만들거나 아니면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확대시켜나가 방향이 보다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막말로 공공미술제도 도입의 목적이 기금 조성이라면%숫자 게임보다는 차라리 일률적으로 기금을 겉은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유재산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교통분담금 등의 사례로 미루어 보다 현실적인 일이다. 화랑협회에서는 계약금액의 5%를,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미술인회의에서는 10%를 상정하고 있어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공공미술센터 위상-권력기구냐. 지원기구냐
기금의 조성이 주된 목적이라면 당연히 조성된 기금을 운용할 기구의 설립과 그 기구의 조직체계와 주체, 위상의 문제가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가장 큰 쟁점은 조성된 기금을 사용하는 방식, 즉 공공미술센터가 공모, 선정, 심의, 감리 기능까지 포괄하는 기구로 할 것인지 연구, 조사, 관리 기능에 국한되는 지원기구로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 부분이지만 실제로는 기금이 얼마만큼 조성되느냐에 따라 형태가 사뭇 달라질 것이다. 즉 기금이 별로 없을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지원업무에 머무르게 될 것이며 기금이 제법 모일 경우에는 기금을 더 이상 걷지 않거나 마냥 쌓아 두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공모, 선정, 심의, 감리 기능까지 영역을 확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센터의 위상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어쩌면 센터가 EH 하나의 권력기구화가 되거나 혹은 잡음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조성된 기금의 사용에 대한 유연하고 탄력적인 운영의 묘가 요구된다.
화랑협회와 미협에서는 센터 설립 자체를 반대하거나 최소한 권력기구화가 아닌 지원기구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화랑협회는 공식적 입장으로 조성된 기금을 운영할 별도의 기구로 (가칭)미술장식품발전위원회를 상정하고 있다. 즉 공공미술센터나 미술장식품발전위원회나 명칭만 다를 뿐이어서 운영방식에 대한 합의만 된다면 센터 설립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미다. 오히려 화랑협회나 미협에서는 센터 설립 등 제도 자체에 대한 맹목적, 감정적 반대가 아닌 적극적인 의사 표명과 센터 운영에 대한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 보다 능동적인 방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터 설립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시안에서는 16개 광역시.도에 지부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고 센터의 장은 지자체장의 치적 성향에 따라 센터의 영이 좌우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일부 지역의 경우 센터에서 공모, 선정, 심의까지 하게 되면 공무원과 지미술계 인사들의 담합을 통한 부정과 비리의 유혹에 빠져 들기 쉬운 구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심의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했을 때 센터와 심의위원회 간의 마찰이 빚어질 경우 자칫 힘겨루기로 치달아 이에 대한 피해를 건축주가 고스란히 안게 될 위험성이 크다. 중앙센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서울시를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서울시도 엄연한 지지체의 하나이므로 서울시의 반발이 있을 경우 중앙센터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질 소지가 다분하다.
이처럼 공모, 선정, 심의 등 권력이 집중될 경우 견제 장치를 세심히 고려하지 않으면 지자체의 입김이나 지역의 텃세와 담합에 밀려 오히려 잡음의 진원지가 될 소지가 무척 크다. 무엇보다 결국 센터의 위상이 정치적인 입장, 지역이기주의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기는 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닐 것이다.
센터의 설립과 상관없이 심의제도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심의제도는 준공허가를 빌미로 상당한 전횡을 휘두르고 있는데 반해, 실제적인 작품의 수준이나 제작비 사용의 타당성을 검토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준공 허가와 관련된 조항은 좀 더 유연해지되 심의위원들의 구성을 10배수 이상 늘리는 등 심의위원풀제나 지역 간 교차심의제도 등의 도입을 검토해 볼 만하다.

공공미술, 과연 시장과 유통은 필요 없는가?
사실 공공미술제도에 대한 논란은 어쩌면 공공미술시장이 전체 미술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규모가 엄청나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얘기해서 공공미술시장 규모가 외국처럼 전체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에 불과하다면 지금처럼 온 동네 미술계가 발칵 뒤집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꾸로 외국의 공공미술제도의 범위가 한국처럼 민간 건축물에 전면적으로 시행된다면 사뭇 다른 양상, 즉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이 상당부분 작동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술시장이 극도로 침체된 지금. 2003년 기준으로 한해 미술시장의 규모는 약2,000억에서 2,500억 가량 될 것으로 추산된다. 얼핏 엄청난 규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재작년 ‘자일리톨’ 매출 규모가 3,000억 가까이 되는 것으로 미루어 미술시장의 규모가 껌 시장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껌 값만도 못한 미술품”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해외 작품 거래가 2003년 기준으로 1,000억에 이르고 삼각지 등에서 제작되어 국내 유통과 해외로 수출되는 소위 ‘이발소 그림’ 시장이 1,000억, 미술장식품 500억 등을 빼고 나면 순수하게 국내 작가의 현대미술이 거래되는 금액은 500억에 불과하다는 황당한 수치가 나온다. 결국 공공미술시장의 규모가 전체 미술시장 규모로는 약 20~25%, 국내작가의 현대미술시장 규모와 맞먹는 금액이라는 수치는 한국의 공공미술 자체를 미술시장과 E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화랑협회나 미협 등이 대다수의 미술계에서 사실 공공미술제도 도입이 ‘대세’임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제도 도입의 반대가 결국 각론에 대한 반대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결사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공공미술시장 축소가 가져올 여파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화랑협회에서 반대하는 것, 즉 공공미술제도에 상업화랑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일견 타당한 말이기도 하지만, 역시 시장논리에 의해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상업화랑이 항상 ‘베니스의 상인’으로 취급받아 왔기에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하지만, 미술시장의 3대 구성요소로서 작가(생산자)-화랑(중개자)-컬렉터(소비자)로 상정했을 때 화랑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고 작가가 생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중개인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미술시장이 보다 선진적인 시스템과 합리적인 유통구조가 정착되면서 자연스럽게 정립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개업체의 등록제를 통한 양성화는 그래서 오히려 화랑협회에서 환영하는 것이다. 중개업체의 남발을 막고, 양성화를 통해 투명하고 합리적인 중개료의 창출, 즉 건전한 소득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작가가 공공미술과 관련하여 행정적인 처리, 심의서류 등 창작활동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것보다 중개업체의 전문화를 통해 역할분담이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기획력과 전문성이 갖춰지지 않은 중개업체가 단순히 인맥과 로비를 통해서 수주하는 것은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센터에서 공공미술 코디네이터가 중개업체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코디네이터가 모든 행정, 심의, 세무처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하거나 아니면 중개업체에서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 사보제작이나 디자인 업무 등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전문성을 살리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시장구조가 점차 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화랑 등 중개업체의 역할은 오히려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간 상업화랑의 형태가 이 같은 인식을 자초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당연히 화랑의 반성과 뼈를 깎는 개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건전한 유통구조의 정착과 곧 시행될 공공미술제도 내에서 화랑 등 중개업체의 필요성을 스스로가 주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정될 수 있는 선결조건일런지도 모르겠다.

출처: 윤태건 2004 문화예술 통권301호 (2004. 8) pp.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