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포털 관련 전문가 칼럼입니다.
▲이천 설봉공원 조각공원 전경 소득수준의 증가와 해외관광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시민들은 도시환경과 현실사이의 격차를 절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열악한 도시환경에 대한 타율적 적응훈련에 수동적으로 감내하고 있는 실정이다.도시는 자본이 집결하고 생산과 소비가 교차하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교류지이고 교통의 중심지인 공공장소이다. 농업사회의 정태(情態)적인 삶과 비교해 볼 때 현대사회의 도시는 매우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하며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임과 동시에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인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건축물들은 단지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적 공간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한 사회가 실현한 문화적 가치를 그 사회의 구성원이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체험하는 장소로써 의미가 있다. 따라서 건축물은 이 같은 공적 체험을 매개하는 장소로써 환경적으로 쾌적하고 윤택한 공공적 공간이라야 한다. |
▲신종택 <하모니> 2005 그러나 상황이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협업의 양상은 상업적 이해관계 아래서 비롯되기 때문에 늘 물밑 거래가 횡횡하고 리베이트가 오고간다. 또한 설계단계부터 미술가가 참여하기보다는 건물이 이루어지고 나서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이른바 ‘플롭 아트(plop art)’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십상이다. 건축가들의 자기완결성과 배타성도 미술과 건축의 조화로운 만남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그들은 건축물 그 자체를 완결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장식물을 원치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형성기 때문에 심화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미술작품도 하나의 유형자산으로 경제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미술의 당위성이 사회적 통념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시민들은 물질적 이해관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목적에 대한 자발적 동의가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환경적 습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환경적인 지배 관계가 개인의 의식 속에 각인되어버리고 경제적 이해관계는 공공성의 형태로 재편될 것이다. 더욱이 미술작품은 사회적 공공자산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의 특정한 가치관인 미적 자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의도적으로 공공성을 부인한 경우를 제외하고 미술은 늘 공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누가 뭐래도 미술은 생겨나면서부터 사회적 자산으로 공공성을 확보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미술의 공공성은 환경미술이라는 형태로 거듭 존재론적 정당성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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